연극 평론가 김방옥은 오태석을 현대 한국 연극계의 큰 나무로 이해해야 할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로 연극계의 주된 사조나 경향이 십년, 이십년 단위로 바뀌고 따라서 한 작가의 전성기 생명이 십년, 이십년을 넘기기 어려운 우리 극계에서 오태석은 70년대 초 이후 오늘까지 삽십년이란 기간 동안 끊임없이 고른 열정으로 문제작을 생산해 왔고 앞으로도 작품활동을 계속할 거의 유일한 연극작가-연출가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연끄이 형식적으로 다양하고 현란한 기법을 추구하고 잇지만, 일단의 문제작을 볼 때 그 근저에는 “‘한국적’이라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깔려있음을 보자. 이러한 90년대 주요 연극의 특징과 요소들이 그의 70년대 작업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오태석은 처음부터 한국적 유산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내면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서구적인 것과의 단순대립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 한국적인 것, 한국인의 삶과 정서나 언어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구현하려는 그의 연극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초논리, 무제한의 상상력, 유희성, 비약과 전도, 해체등의 요소가 오래전 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우와 사랑을’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의 연극을 보며 오태석의 ‘자기세계’라는 것에 주목하는 이유는 시류에 편승한 단편적 아이디어나 테크닉의 과시 등이 난무한 연극계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 깊은 심성에 뻗친 푹익은 정서가 돋보이기 때문이었다.

‘오태석 연극제’에서의 ‘도라지’이후 이년여만에 내놓은 창작극인 이번 공연 ‘여우와 사랑을’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비인간성과 부패에 대한 통렬하고 직설적인 분노의 연장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은 인천 앞바다에 상륙하는 뱃고동 소리와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대는 우리 연변동포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시작된다.

따뜻한 동포애를 기대했던 그들에게 서울은 오히려 낯선 타국보다 더 냉담했으며 윤리의 황폐와 물질만능의 사회적 모순 등이 여과기 없이 그들에게 빨려들어온다.

그들이 한국에 온 이유는 5천불을 벌어 용정으로 돌아가 아담한 불고기집을 차리는 소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에서 여우가 없어졌으므로 여우를 발견해주면 상금을 준다’는 사실에 솔깃한 연변의 윤동주 사상실천선양회 사람들은 연변의 여우를 한국에 풀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들은 그야말로 ‘서울방식’으로 돈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워 한몫 챙기려는 사기행각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밟고 일어서야한다는 시대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면서 하루하루 더 악랄한 현대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에 아파한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악착스러워도 서울사람인 ‘우리’보다는 덜되바라진 연변사람과 외국인노동자를 통해 그들의 눈에 비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거기엔 이들의 힘든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허상과 광기를 내보이자는 뜻이 담겨있으리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사람다운 삶’이 아니낙 싶다.

‘언젠가’의 한국인처럼 기개와 품위를 지킬 수 잇는 한국인, 그것이 손상되고 왜곡된 모습을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잘 견뎌내고 있던가. 이것을 연출가의 소박한 역사의식과 도덕관, 가치기준이라고 하면 어떨런지. 어뜻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공격적 무대’는 기발한 극진행과 예기치 않은 감동으로 그야말로 에너지와 관록의 조화를 보여준다.

앞만보고 달려온 우리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들의 행각에서 동시에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연극이란 무대 바로 앞의 살아있는 관객과 지금 답답한 것을들 무릎을 마주대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라는 오태석의 살아있는 연극론을 실감하게 된다.

연극중에 우연히 3층에 홀로 앉아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 뜨거움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여우?아니면...?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