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득적 아나키스트, 날라리

지난 여름에 친구 중에 갓 선생이 된 놈이 하나 있어 만난 적이 있다.

무슨 여중쯤에 신참내기 생물선생으로 들어갔는데, 어쩌다 날라리들 얘기가 나오니 고개를 설레설레한다.

막무가내로 골치덩어리 집단이라는 얘기다.

‘깻잎머리 알어?’했더니 ‘그게 뭔데?’되묻는다.

‘아 왜 야물딱지게 앞가리마 짝 갈라서 꽃삔 딱 찌르고 다니는거 있잖아. 그거 깻잎머리라고 한대. 예쁘지 않누’했더니 아주 기겁을 한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한때는 같은 여고에 같은 학생이었고 그리고 그 인연으로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그 순간, 내가 학생주임의 얼굴을 얼핏 봐버린 것은. 그 다음에 그 친구가 들려준 말이 더 가관. 그 깻잎머린가 하는 걸 뿌리뽑아 보려고 학교에서 교장선생이 직접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원칙인 즉슨 머리가리마는 코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3센치 이상 비껴난 곳에 해야지 앞가리마 타고 다니면 교문에서 규율부가 두발불량으로 잡는다는 얘기였다.

귀밑 몇센치에 반발하는 애들에게 코로부터 몇센치 가리마를 정해주고 싶어하는 저 얄팍한 논리, 두발불량이 어쩌고 하는 조악한 협박까지 그대로다.

나 역시 모르고 당했으니 버텨냈지 지금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한게 중고등학교 생활이다.

굳이 입시제도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하루하루를 옥죄는 논리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설득력 없는 금지의 논리였다.

왜 금지하는지는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헤어무스니 헤어스프레이가 상용화 되었을 때 쯤이었다.

머리에 무스나 스프레이 뿌리지 마라, 명령이 떨어진다.

혹 왜냐고 물으면 엉뚱한 대답을 한다.

머리카락에 신경쓰고 외모에 신경쓰면 공부 못한다는 것. 또는 반항적이고 불량해 보인다는 것. 소위 학문을 논리 정연히 가르쳐야 마땅한 선생들이 매번 그런 식이다.

왜 안되냐고 물었는데 머리에 신경쓰면 공부를 못한다니. 그게 웬 동문서답인다.

내 나이가 몇이건 열여덟이 안되었건 열셋이 안되었건간에 내 머리는 내가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Not A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Why Not?했더니 B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격이다.

금지명령은 항상 체벌의 협박과 어울린다.

담배 피우지 마라. 담배 피다 걸리면 정학이다.

금지와 체벌의 융단폭격. 그 속에서 나는 전위적 게릴라들을 알고 지냈다.

그들은 소위 날라리, 스프레이로 철사처럼 꼿꼿하게 머리를 세우고 다니고, 중학교때는 롤라스케이트장을 선점하고 고등학교때는 까페에서 담배를 필줄 아는 친구들이었다.

남자친구가 있고 성경험이 있고 가출행각을 벌여 본 반의 낙오자, 일탈자, 혹은 날나리라고 불리우는 애들 말이다.

그들은 선생들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했는데, 수업시간엔 잠잤고 쉬는 시간엔 치장을 했고 점심시간엔 담을 넘었고 방과후에는 놀러다녔다.

그들의 가정사가 어떠했는지 혹은 그들의 개인 각자의 pre-history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누추하고 매우 괴뤄웠는지도 모르고 혹은 번듯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제도 밖에서 유유할 수 있었던 그들의 생득적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TV에서 ‘청소년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인가를 봤다.

전교 1등에서 50등까지만 가는 특별야간자율학습(특별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교5등의 공책을 빌린 50몇등짜리가 50등내로 들어가고, 공책빌려즌 애는 특별야자에서 짤리고, 짤려서 분개한 전교5등(전교 몇등이라는 말이 이름처럼 자연스레 불리워질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필자)이 긴급HR을 소집하고 특별야간자율학습의 차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할때 즈음, 뒤에서 일어서는 불량끼 가득한 날라리 하나의 일갈.“우린 상관없어, 전교 50등까지만 특별야자를 하건 100등까지만 하건 우린 어차피 아무 상관없어, 니가 매번 특별야자에 갔었을 때, 너 한 번이라도 이런 학급회의 소집한 적 있어? 우린 차피 그런 거랑은 상관없어. 난 뭐가 불공평한지 모르겠어. 그냥 이런 HR시간 짜증나니까 너 공부 더 해서 특별 야자 들어가던지 말던지 해”하고 앉는다.

그래, 저런 거 아닐까. 저 깻잎머리 아이들의 생득적 저항은, 누가 가르치지 않고 저절로 형성될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저항은 조직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우리는 권력다툼을 저항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마이너리티가 메이저리티의 권력다툼 하는 것에는 마이너리티만이 가지는 저항적 성격이 덮었씌워져 저항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가 지향하는 바가 단지 메이저리티로의 진입이라면 그것은 이미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헤게모니 싸움이다.

마이너가 메이저로 바뀌더라도 여전히 마이너에 서 있는것. 항상 권력의 메이저에서는 일탈해 있는 것만이 저항이다.

전교50등 밖에서 전교 50등 안을 지향하는 애들에게는 없는, 결코 메이저가 될 수 없는 이들. 그들의 이름이 날나리이다.

‘신세대’라는 명목적인‘론’에서조차 그들은 벗어나게 된다.

나는 누구처럼 날라리 만세론을 풀어낼 자신도 없고, 깻잎머리 아이들 만세, 라고 외칠 기분도 아니다.

다만 내가 날나리 문화론을 쓰게 된다면 그들을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고 호출하고 싶다는 욕구만이 있었다.

이제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들을‘생득적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들을 저항하는 자라고 평가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수능시험이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이 땅의 수많은 학생주임들에게 갈기는 날나리들의 따귀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코로부터 몇센치규정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제도교육의 메이저들에게 다시 반항적 옆가리마 패션이 유행하기를 바라마지않는 마음으로.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