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유학 갔던 김성만은 미국에 반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꿨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받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10년 넘게 감옥에 있다네..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신념으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에선 당연히 합법...어머니의 이름으로그의 누이의 이름으로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벗들의 이름으로...그를 석방하라!” 영화관의 어둠 속에 익명으로 파묻혀 그저 영화 즐기기를 좋아하는 내게 이번 인권 영화제는 달랐다.

영화 상영을 위한 어둠이 전과 달리 불편하게 느껴졌고 내내 무언가 머릿 속을 혼란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인권영화제 개막작품 ‘잊지말자’는 국제사면위원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필립 느와레, 까뜨린 드뇌브, 에드가 모렝, 장뤽 고다르 등 30명의 배우·지식인·감독들이 만든 옴니버스형식의 영화로 양심수 석방 및 권력에 의한 희생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세계 각국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 스물 일곱번째 에피소드가 바로 우리에게 ‘Z’·‘실종’등 정치영화로 잘 알려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뮤직 비디오 형식으로 만든 한국의 양심수 김성만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의 랩가수, 수많은 흑인, 백인들의 창백한 김성만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진 벽을 배경으로 그의 사진을 들고 거리에서 춤을 추며 그의 석방을 외치고 있다.

가장 직설적 음악이라 할 수 잇는 랩의 형식으로 짧고도 강렬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상징을 담은 정적이 화면 혹은 절제된 인터뷰나 편지 낭독을 위주로 한 다른 이야기들 속에-물론 지극히 짧은 3분이라는 시간들 속에 표현된 다양한 영화 기법들 자체로도 충분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불쑥 튀어나온 한국편은 가장 독특한 동적인 구성을 하고 있기에 관객들에게 자못 당황함을 안겨 준 듯했다.

정적만 흐르던 관중석에 한순간 술렁임이 인 것은 김성만이라는 한국말이 프랑스 가수의 입에서 거칠게 튀어나오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일수도 있겠다.

내가 그 술렁임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은 지난 여름의 한 기억이 나를 영화가 사영되는 그곳으로부터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학생이 이대생이라고? 우리 아들 여자 친구도 이대 다니던 예쁜 아가씨였는데...우리 아들이 면회오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라구 자꾸 그러니까 울면서 가 버렸지...우리 아들은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미국 유학가서 공부 열심히 하던 착한 애였는데,...걔를 잡아다가 손발을 묶고 몇달 동안 죽도록 괴롭히고...내가 걔 구하러 다니느라고 이렇게 늙어 버렸어...” 지난 여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주최한 ‘96 양심수 석방을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었던 1천9백96인 서명운동을 돕기 위해 민가협 어머님들과 함께 국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어머니 한 분과 동아리 친구 한 명씩 짝이 되어 국회의원 사무실을 돌아다녔는데 나와 함께 다녔던 유난히 몸이 쇠약하신 어머니가 바로 김성만씨 어머니였다.

의원들이 거의 없었던 까닭에 다시 방문하기 위해 넓은 의원회관을 몇 바퀴씩 도는 동안 어머니는 몹시 힘겨워 하시면서도 쉬고 계시라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으셨다.

김성만씨는 5공 시절의 대표적 간첩조작 사건인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85년 구속, 두달 이상 외부와 차단된 채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 도중 죽을 것에 대비해 가짜 유서까지 강요받았다고 하낟. 결국 뚜렷한 증거도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지금은 무기로 감형되어 11년째 복역 중이다.

그리고 정부는 어머님의 11번째 피맺힌 호소에도 아랑곳 없이 올 8.15특삳 각종 비리사범들에게만 눈을 돌렸다.

민가협이 “형법98조‘간첩죄’를 적용받거나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의해 7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로 규정한 장기 복역 양심수는 현재 90명이며 그 외의 양심수가지 함하면 지금 한국에는 1천5백70여명의 양심수가 있다.

그 중엔 39년째 살고 계신 우용각씨를 비롯해 27년을 산 만델라보다 오래 살고 있는 분이 23명에 일며, 그렇게 오랜 세월 수감되셨던 분들은 형기를 마감하고 출소하신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돌아갈 곳이 없어 감옥보다 열악한 감호소에 수용되어 고령의 병든 몸에 다시 감시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자리가 불편했던 건, 거리에서 구걸했다는 이유로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공권력에 의해 폭행당하는 과테말라의 아이들, 군인들이 다니는 산길에서 행방불명된 필리핀의 사회복지원들, 30년이 넘게 감금돼 있는 베트남의 저항시인 구엔 치 티엔, 그밖에 실종되거나 갇혀 잇는 혹은 죽임을 당한 각국의 수많은 노동 운동가들, 재야 인사들...이들이 이 땅에서도 그다지 낯설지 않음에도 그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여름 그렇게 민가협 어머님들과 헤어진 후 나는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일상에 매몰되어 갔고 일주일에 한 두번 동아리 친구들과 세미나랍시고 한국의 인권이 어떠니, 무엇이 모순이니하는 공허한 논쟁만을 해왓다.

바쁜 의대생이라는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 주었고 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더 합리적인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 중엔 인권(구체적으로는 자유권)을 침해당한이는 없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그 영화를 보고 조금이라고 불편햇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인권을 침해당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영화가 영화같지 않앗다.

”라는 수근거림을 들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에게 수동적인 소비자이기만을 강요하면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알게 모르게 심어 주는 헐리우드식 상업영화에 얼마만큼이나 길들여져 왓던 것일까? 그것이 어느 틈엔가 우리를 단지 역사와 예술, 이념에 대해 관조하는 존재로만 규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엇는지. 게다가 우리에겐 바로 얼마 전까지 사전심의라는 제도가 존재하여 그러한 소위 제1영화만을 대량 공급받아왓고, 그것이 위헌판결이 난 지금도 비디오에 관한 한사전심의는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할 권리를 박탈당해 온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기막히는 두가지 뉴스를 읽었다.

이번 인권 영화제가 사전심의를 거부한 채로 진행되었으나 이미 매스컴 등을 통해 홍보된 행사였는데 관할 구청에 사전에 행사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법이란다.

(그렇다면 광장에서 하는 월요영화제도 매주 신고를 해야 하나? 비디오 사전심의는 왜 얘기하지 않는 거지?) 또하나, 부산 시내 여러 서점에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 닥쳐 사회과학 서적 수십권을 불론이라고 압수해 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새내기 교양서적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미 너무 나 보편화되어 유통되고 잇는 책들도 많앗다.

“한 사람이 자유롭지 못하면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자유롭지 못한 한 사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은 선량한 휴머니스트로서의 동정에서가 결코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닌 이 사회의 정의라고 믿는 바를 위해(그의 신념과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불문하고)행동하려 했던 것이 억압의 사유가 되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의무인 동시에 소중한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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