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희생제의가 준비되고 잇다.

제물은 장정일이라는 이름의 소설가. 그에게는 시대의 풍속을 교란하고 더럽혔다는 혐의가 준비되어 있다.

희생제의란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러했듯이 본질적으로 한 시대의 모든 악덕과 모순과 추악함을 제물에게 전가한다.

그럼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잠시나마 그 사회의 모든 어두움에 대해 망각하게 된다’-장정일 죽이기에 반대하는 젊은 소설가들의 모임(젊은소설가모임)성명 중에서. 과연 이 사회는 언제까지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간행물 윤리위원회(간륜)는 10월31일(목) 장정일의 장편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음란물로 판정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방검찰청 형사3부는 이 소설의 음란성 여부에 대해 수사중이다.

이 책의 출판사인 ‘김영사’는 간륜의 제재 조치가 내리기 전 이미 초판 1만권 중 팔리지 않은 책을 회수하고 절판 선언을 한 바 있다.

텍스트는 작가로부터가 아니라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그순간에 완성된다.

하지만 출판사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자체 검열을 하게 된 이번 사레는 그 존재만으로도 텍스트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검열의 파급려을 엿볼 수 있게한다.

이 사건은 작가 장정일에게 사법조치가 내려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인해 문단 안팎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

일각에서는 작가의 표현의 자유, 독자의 자유로운 판단을 침해하는 간륜 결정의 부당성에서는 벗어나서 장정일의 문학성, 작가성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젊은 소설가모임 이응준씨(소설가)는 책의 절판과 작가구속설 등으로 이어진 사태의 원인으로 “한 작가가 탄생하기까지의 작가의 부단한 노력과 독자의 끝없는 관심, 문학이라는 매체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한다.

상상, 욕구를 제한하는 사회의 폭력성은 오히려 음지에서 포르노테잎, 홍등가의 수요를 넘치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아래 문학적 상상력만이 문학에 대한 이해 없이 ‘음란’이라는 책임을 지게 되는 현실은 비판받을 만하다.

매체에 관한 검열로 들끓고 있는 곳은 문학 분야만이 아니다.

만화계에서는 문화체육부가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청소년 보호안)’입법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우만연)’,‘한국ㅁ나화가 협회’,‘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협회’로 구성된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대책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사단법인인 간륜은 민간기구의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30년 동안 친정부적 성향을 가지고 대본소용 만화를 사전에, 서점에 배포되는 만화를 사후에 이중으로 검열을 해왔다.

더군다나 청소년 보호안에 의하며 간륜은 법제화되어 사실상의 국가기관이 된다.

또한 청소년 보호안 제10조 유해매체물 심의 기준을 살펴 보면 청소년에게 성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 또는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를 해하는 것 등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건전한’매체란 누군가가 규정한 다고 건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심의필’을 받지 않았다고 어떠한 매체가 불건전해지는 것도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검열이라는 사회적 규제를 피해 제목없는 포르노테잎을 찾아 청계천을 배회하는 청소년들에게 건전/불건전의 기준은 저멀리에 있을 것이다.

우만연 사무국장 백정숙씨는 “청소년 보호안 초안의 만화 사전심의 가 수정한에서 사라지고 기준이나 방법 등이 시행령으로 넘어간 상태”라고 상황 설명을 한다.

“앞으로도 시행령에 심의를 할 수 있는 세칙은 없는지 살피고 검열철폐를 원힉으로 상황에 맞춰 대응할 계획”임을 밝혔다.

30년 만화검열의 역사에 비하면 뒤늦은 대응일지도 모르나 단호한 의지를 다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일 수 있다.

음반, 영화, 비디오를 거쳐 ‘청소년 보호’라는 방패를 가진 검열은 타 매체에도 쉴 새 없이 위협을 가하고 있다.

국가기구인 공연 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는 명백한 검열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장정일 소설·만화 사전심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서 자체 정화력을 불신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볼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를 무서워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문화에 자신이 없는 사회”라는 소설가 이응준끼의 말은 되새겨 봄직하다.

불건전한 사회란 구성원들의 변별력을 무시, 그들의 표현과 상상력을 침해하고 건전/불건전의 경계를 미리 구분지어 놓은 사회가 아닐까 한다.

문제의 핵심은 ‘장정일’이나 ‘만화’가 아니다.

한 작품, 혹은 한 매체를 짓이기고 억압하는 검열은 언제 그 칼날의 방향을 돌릴지 모른다.

폐기처분해야 할 작품을 쓴 ‘그 또는 그녀’가 언제 ‘내 ’가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그 또는 그녀’의 상처입은 작품만을 수용하는 ‘나’의의식은 이미 칼질당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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