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문화담론 진단

“나쁜 새 것이 좋은 헌 것보다 낫다” 예술 창작에서라면 이것은 로ㅎ은 말일 수 있다.

이미 정해진 형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 구칙을 뒤집어 생경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현실과 자아를 반성하게 하는 것은 예술 창작의 기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창작태도에 관련될 때에만 맞는 말이다.

즉, 그것은 사실판단의 기준에 관한 명제가 아니라 은유이고 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사실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적용할 때면 기막힌 오해가 생겨난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천박하고 속물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둔갑하여 거리를 활보하게 된다.

문화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이 그러하진 않을까 화두를 던져본다.

문화비평지들과 일간지, 시사지의 문화면을 주름잡는 수많은 0‘문화비평’에 대한 단상으로 그것이 비평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개나 누구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잡다한 생각이 입심좋게 펼쳐진 잡담 또는 부풀려진 과장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문화란 누구나 접하고 있는 것이며 문화에 대한 느낌과 생각은 소박하게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형편에서는 마음만 먹으며 문화비평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가. 이를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은 그러한 현상의 원인을 컴퓨터의 보급에서 찾는다.

통신의 발달에 의해 정보뿐아니라 대중의 의견을 손쉽게 대량으로 확산하고 교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컴퓨터가 대신 글을 써 주는 것은 아니라는 단순한 반박에 대해 그들은 이미 대답을 준비라고 있다.

매체가 인간의 사고와 창작 비평 활도에 파급하는 영향을 그들은‘사이버적 상상력’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이버적 상상력’을 주장하는 이들은 범람하는 수맣은 이야기들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새로운 매체의 특성으로 인한 새로운 공각 속에서의 새로운-따라서 더 좋은-상상력’이다.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사이버전사쯤으로 자신을 표상하는 이들에게‘새로운 상상력’은 진보적, 새로운 의미에서 민중적인 것이며‘주류 문화’는 낡고 따라서 더 못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적이다.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모든 소수 문화에게 주류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므로 그러한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보는 주류가 무엇이냐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질서를 재생하는 상업주의 문화·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문화인가?그들의 분류법은 상당히 특이해서 기존의 문화운동을 주도한 집단의 문화, 문단에 진출한 작가들의 문화는 권력을 가진 문화이고, 사이버 공간을 통한 대중들의 수다는 권력에 도전하는 문화가 된다.

즉 관건은 판을 잡고 있는가 아닌가가 된다.

기존의 문화운동판이나 문단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비판의 대상과 대척점에서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로와 허황된 과장이다.

그것은 비평의 가장 기본이 되는,내용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애초부터 배제한다.

비평의 대상이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돼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작품 혹은 작자가 판을 잡고 있는가 아닌가의 이분법에 의해 그의 권력욕을 간파한다.

마광수에 대해 기본적이 ㄴ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조치에 대한 비판이 왜 마광수에 대한 지지가 돼야 하는가? 우리 가요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비판이 그 중에서 비교적 참신할 뿐인-그러나 외국에서 이미 실험된 것을 모방했을 뿐인-신해철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찬으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을 아낌없이 칭찬함으로써 우리 가요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전략이라는 변명은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우리의 문화담론이 현재 보이고 있는 수다는 비논리적인 논법에 근거한 섣부른 도취이며, 바로 그 자신이 비판하는 권력욕에 의한,자신의 ‘판’을 벌이고자 하는 욕망,혹은 문화산업을 겨냥한 자본주의 상업논리에 다름 아니다.

음악·영화·문학·성에 대한 담론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본다.

현실의 모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않으면서 새로운 현상이나 새로운 시도에 대해, 그것이 새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 맥락은 무시된다.

가령 외국에서 동성애가 눈에 띄는 사회현상으로 대두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이 일종의 인권 침해로서 사회문제로 떠오른 맥락, 혹은 사회구조적 성차별과 이성애의 폭력적 억압적 측면을 반대하는 일종의 정치적 결단으로서의 동성애 운동의 맥락은 전혀 없이,‘이유없는’진보의 표방이 먹혀 들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문화현상 비평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성실한 시선인가,아니며 ‘낡은 것/새 것’의 이분법에 의한 끼워맞추기인가?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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