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처럼 편안한 패션정장’ 위 구절은 어느 선전문구에 등장하는 말이다.

‘재즈’와 ‘편안함’과 ‘패션’과‘정장’을 연결시키고 있는 이 문구는 지난 해 한국땅에서 때아니게 불어닥친 재즈열풍의 본질을 매우 간명하게 집약시켜 놓고 있다.

‘-처럼’이라는 직유의 조사에 의해 비유의 항목이 된 ‘재즈’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편안함’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사용되는 비유항으로 대상화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패션’으로 모아진다.

그것은 다시 재즈의 항목으로 거슬러 올라가 의미를 길어오는데, 재즈를 즐기거나 재즈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스타일리스트들이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멋을 지니고 잇는 사람들이라는 은근한 암시가 ‘편안함’이라는 형용사를 가로질러 재즈와 패션을 연결시켜준다.

그리하여 결국은 ‘패션 정장’이라는 독특한 패션 개념이 탄생한다.

그러한 패션 개념을 유통시키자 하는 사람들은 록음악처럼 아주 공격적이고 반항적이지도, 클래식 음악처럼 구닥다리도 아닌, 편안하고 어른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이고 화려한 것으로 여겨지는 재즈의 특성에서 하나의 전형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재즈는 실제로 그렇게 ‘편안한’음악이 아니다.

미국 남부의 뿌리뽑힌 흑인들의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재즈는 본질적으로 민중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이다.

그것은 뉴올리언즈 번화가에 나앉은 거지 장님의 음악에서 출발한 음악이며, 남부의 뙤약볕과 목화농장의 중노동과 주인님의 채찍을 견디기위해 노예들이 불렀던 노동요에서 풀발한 음악이다.

또한 그것은 뉴올리언즈 홍등가에서 몸을 팔던 창녀의 노래, 거기에 빌붙어 연주를 하던 불쌍한 흑인 악사들의 음악이기도 하다.

재즈의 그러한 특성은 재즈의 출발이 된 스타일인 뉴올리언즈 재즈나 요즘의 애시드 재즈나 다 마찬가지이다.

뉴올리언즈의 홍등가에서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의 흑인 게토까지 재즈사 백년을 관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길거리 음악의 천박함과 처절함이다.

거기에서 자양을 얻어 형성된 것이 바로 재즈사 전체이다.

재즈는 예나 지금이나, 가난과 인격모독의 고통 속에서 미래없이 살아가는 흑인들, 혹은 중하층 백인들, 나아가 전세계 민중의 자기 표현수단인 것이다.

재즈의 생명력은 바로 거기에 기반하고 잇다.

물론 재즈와 순수한 민속·민중음악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즈는 흑인적인 바탕에다가 백인들의 음악적인 방법, 악기 등을 결합시킨 것이므로 일종의 ‘혼혈아’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더구나 재즈는 민중적인 뿌리를 세련된 방법론으로 다스림으로써 고도의 자임새를 갖는 미적인 구조물에 보다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재즈사의 그 어떤 시기에 잇어서도, 재즈가 자신의 본질적인 ‘길거리 기질’을 잃어버린 적은 없다.

길거리 음악으로서의 재즈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천박한 엔터테인먼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천박함과 적나라함 자체의 진솔한 특성에 의해 그리 편안하거나 만만한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유표되고 있는 재즈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스타일은 ‘쿨’적인 특성을 가진 재즈이다.

‘쿨’이라는 형용사는 재즈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지칭하는 광의의 의미도 지니고 이다.

그러나 쿨 재즈는 가장 재즈답지 않은 재즈로 간주되고 있다.

쿨 재즈가 가장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재즈 열풍이 모종의 허위의식과 함게 유표되고 잇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50년대 쿨 재즈는 전후 서부 캘리포니아의 백인들이 느끼는 삶의 권태를 반영한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등대카페’에 모인 백인들은 어느 정도 여유있는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뮤지션들 역시 헐리우드의 스튜디오 같은 곳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실험에 골몰했으며, 흑인들처럼 직설적인 즉흥연주를 길게 뱉어내기 보다는 간단하고 절제된, 나른한 음색의 프레이즈를 응축시켜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즐겼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음악적인 혁신을 감행했는데다가 백인 중산층의 삶의 고통과 밀착된 것이어서 호소력이 강했다.

그러나 이는 삶의 근본적이 고민과 회의에 연겨로디어 있기도 했지만, 실상은 당대 중산층의 허위의식과도 연겨로디어 있다.

쿨재즈는 마치 ‘모든 것을 잊어 지금 이 순간 당신 몸이요.’라고 권유하는 섹시한 여자/남자와도 같다.

퇴폐적이며, 동시에 매혹적인 장갑을 낀 그 손은 삶의 *쩍 가려준다.

그리고 ‘** 우회하도록 한다.

그러면 그 우회를 통해 삶의 *에서 조금 자유로와진 새로운 혹은 그 고통을 슬쩍 웃지만 어딘지 외로와보이는 인간이 탄생하는 것으로 아니, 정확히는 그러한 *드는 보이지 않는 손 그렇게 여겨지도록 조장당*가 비교적 자유로운 중산층’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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