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술은 미신인가

만일 사람의 운명이 어느 만큼은 정해져 있고 또 그것을 어느 만큼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순간순간마다 직면하는 크고 작은 선택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미울 수 있다면 선택이 강요하는 무거운 부담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저러한 점술이 성행해 왔을 것이다.

물론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예언 따위에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미신이다.

그러나 병이 나면 병원보다는 무당을 찾고, 오로지 궁합때문에 결혼을 막는다거나 손금이 보여주는 운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야말로 미신적인 태도는 이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 과학기술의 혜택 속에서 자라온 소위‘신세대’들의 대학가에서 점술열기가 수그러지기는 커녕 더욱 성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믿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마지못해 붙이면서도 점술의 예언 앞에 귀가 솔깃해지거나 최소한 끝내 무시해 치우지 못하는 것이 약한 인간의 솔직한 내면이다.

‘재미삼아’로 시작하는 궁금증이 그야말로 재미에만 머무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 불안감을 상쇄할 만큼의 구체적인 미래상이 제시될 때까지 이 불안한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으며, 어차피 스스로의 선택일지라도 그 길이‘운명’에 아로 새겨져 있었더라는 암시는 얻어들어야만 비로소 안도한다.

현실이 이러하다면‘미신’인줄 뻔히 알면서도 컴퓨터에 자신의 생년월일을 입력하는 사람들에게 케케묵은 미신논쟁을 새삼 꺼내들어 논박하는 것은 과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시대착오적 과학만능주의일 뿐이다.

굳이 미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점술이나 예언은 또다른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이야기거리이다.

따라서 이 현상이면에 있는 근원적 호기심과 그 충족에서 경험하는 자잘한 재미들의 정체를 그야말로 ‘과학적’으로 밝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좀더 공리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게다가‘점술’이라는 다분히 폄하적인 개념으로 포괄해 버릴 수만은 없는 다양한 사유체계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쉬운 예로 흔히 조상의 묘자리나 잘 봐주고 음덕이나 보자는 미신으로 여겨지곤 하는‘풍수’는, 우연의 조합으로 도출되는 점괘를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의 소산을 믿는 일반적인 의미의‘미신’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은 전통적인 자연관과 지리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내적 일관성에도 치밀한 학문적 체계이다.

또한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는‘사주풀이’역시 신령스러운 무당은 커녕 자연현상과 인생의 이치를 궁구하는 전통적인 연구자에나 어울릴 법한 하나의 이론적 방법롭일 뿐이다.

한 걸음 깊이를 더하자면 이들 전통학문은‘결정론’과는 거의 인연이 닿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들 전통적인 세계관이 미신으로 매도되면서 통속적으로는 그 핵심적인 사유체계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점술로써만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적어도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혹은 어떠한 그럴 듯한 명분으로든 심지어는‘과학’의 이름으로조차 결정론에 근거한느 점술은 온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하자면 언뜻 과학적인 듯 보이는 미신들도 허다하다.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는 오래된 믿음은 적어도 사주팔자보다는 근거가 박약하며, 심지어는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지능 발달의 정도를 측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지수(IQ)에 그야말로‘미신적’으로 집착하는 기괴한 풍경도 있다.

점술이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때마다 아주 유용한 방패막이로 활용되는‘통계’라는 강변 역시 얄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통계는 적어도 가설로나마 내적 연관의 개연성이 있을 경우에, 지극히 보조적인 참고자료로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쯤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상식이다.

점술을 통계라고 둘러댄다고 해서 미신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통계맹신’이라는 또하나의 미신에 사로잡혀 있음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물며 금세기초를 풍미했으며 지금도 그 잔상이 일소되지 않은 과학적 결정론에 이르러서라면 굳이 전통적 사유체계에만 미신의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요컨대 미신이란, 이론이든 점괘이든 대상되는 진술이 가지는 합리성 여부보다는 그 진술을 대하는 태도의 합리성 여부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그 어떤 진술에 대해서도 그 이면에 자리잡은 사유체계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한은 미신일 수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 과학적인 태도일 것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선택 앞에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가 꼭 해당분야의 전문가로서 과학적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초자연적인 예지 능력이 있거나여서는 아닐것이다.

또는 설령 그가 아주 믿을 만한 예측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오해나 편견 따위로 인해 자신의 성격이나 처지에 관해 부정확하거나 불충분한 정보에 입각한 조언을 해준다면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본디 조언이란 그 진술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선택에 직면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좀 더 반성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불명확했던 자기정당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조언가자 굳이 과학자일 필요가 없다면 그가 점술가라고 해서 이 과정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점술은 혼자서 선택하기에는 왠지 부담스러운 삶의 문제들에 직면해야 하는 불안감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 어떤 근거없는 예언일지라도 충실한 조언으로서만 대한다면 충분히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제 아무리 첨단과학에 입각한 진술이라 할지다로 조언이 아닌 맹목적인 추종의 대상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그러나 본디 과학이 미신일 수 없듯이, 점술도 그 자체로는 결코 미신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 앞에서 자꾸만 물러서며 조언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만 싶어하는 나약함이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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