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치우고 오랫만에 시작된 술자리에선 서로의 넋두리가 쏟아져 나왔다.

『영철이가 떨어졌어』 『어머?』 미정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붙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병태는 며칠전 새벽에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술기운인지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결국 지금은 돈있는 사람만 유리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어. 분명히 영철이는 참고서도 없이 공부했을거야. 부잣집 애들은 과외 선생님에다가 참고서 문제집 모든걸 갖추고 공부해. 그런데 어떻게 동등한 경쟁이 될 수 있어? 구두닦이가 서울대에 갔다고 신문에 크게 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모순을 인정하게 되는거야. 동등한 기회를 주는게 아니라 동등하지 못한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모순을 무마하려는 거야』 『그래, 그렇긴 하지만 영철이가 꼭 붙길 바랬는데』 그말이 남긴 여운이 영철이가 받은 상처만큼 길게 남았다.

『형, 우리 개 이름이 뚝실인데 내가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알아?』 영철의 얘기에 흥분하던 미정이는 갑자기 집에 있는 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집에 전화했더니 뚝실이가 새끼를 났다는거야. 뚝실이는 무녀리야. 어미 뱃속에서 가장 먼저 나온 새끼를 문을 열었다고 해서 무녀리라고 한대. 처음 났을때 다른 것보다 작고 힘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래서 다른 집에 주지도 못하고 우리 집에서 키웠거든. 난 유난히 뚝실이한테 정이 갔어. 그래서 먹이도 내가 주고 저녁때 어디라도 나가게 되면 꼭 데리고 다녔어. 벌써 뚝실이가 새끼를 낳다니. 뚝실이가 낳은 무녀리는 어떨까?』 『무녀리?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그래, 항상 새끼를 낳으면 제일 처음 나온 게 작고 기운도 없고 그렇더라』 『서울에 올라 올때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나도 자취하는 형편에 개를 키운다는 건 무리였어』 『우리 이 다음에 결혼하면 개 한마리 키우자』 그말을 듣자마자 미정이는 기다렸던 사람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니, 그말에 갑자기 왜 그래?』 병태는 가끔 미정이에게 미래에 대해 얘기하곤 했었다.

집은 어떻게 꾸미자는 둥, 아기를 많이 낳자는 둥, 그러면 미정이는 같이 이런저런 풍경을 얘기하다가 행복해 했었다.

그렇지만 둘의 생활공간이 합쳐질 수 있는 건 아주 까마득한 미래 같았다.

첨단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의 힘이 전혀 필요없는 시대가 온다고 했을 때 실감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이 들렸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얘길 즐겁게 하다가도 미정이는 깊은 한숨을 쉬곤 했었다.

미정이는 병태가 달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병태는 미정이 쪽으로 몸을 움직여 미정이를 끌어 안았다.

『갑자기 왜 그러니? 너야말로 무슨 일있니?』 『주인이 이사가래』 『그것 땜에 그러니?』 병태는 그런 이유로 훌쩍거릴 미정이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되물었다.

『아니…….』 『얘기해봐. 그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미정이는 조금 있다가 진정이 됐는지 눈물을 훔쳐내고 얘기했다.

『우리 지금 아기 낳을 수 없겠지?』 『왜 아기 갖고 싶어?』 『만약 지금 내가 아이를 갖고 있다면?』 『진짜니?』 술기운이 일시에 싹 가셨다.

갑자기 개 이야기를 하는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리고 병태는 막연한 상상처럼 부인의 임신에 기뻐하는 남편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병태와 미정에게 임신이란 축복이 아니라 형벌같았다.

『떼야겠지』 미정이의 얼굴에 스쳐가는 공포감을 보면서 강가에서 미정이의 표정을 기억해냈다.

그때의 아름다움은 이런 결과로 오는가 싶어 병태는 씁쓸했다.

『우리 언제쯤 아기 낳을 수 있을까?』 『결혼해야겠지』 이제야 현실감있는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언제 결혼할 수 있을까?』 『글쎄 나 군대 갔다 오고 직장 잡으면……』 『5년쯤 걸리겠다』 『그렇겠지』 병태는 미정에게 미안한 생각뿐이었고 둘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수술대에 오를 미정이가 불공평해 보였다.

『무서워』 『뭐가』 『수술하는 거』 『내가 옆에 있어 줄께』 그리고 병태는 시간을 끌면 수술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되도록이면 빨리 병원에 가자고 말했다.

『미정아 항상 네옆에 있어 줄순 없지만 네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땐 언제든지 있어줄께』 병태는 미정이의 암울한 얼굴을 걷어 내려는 듯 미정이를 힘껏 안았다.

그 작은 육체가 겪어야 할 아픔까지도 껴안고 싶었다.

4. 봄 가벼운 흔들림으로 전철은 터널을 지나고 세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결국 미정이는 자취방을 학교와 먼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주인이 올려달라고 하는 방세만큼 충당할 수 없어 위성도시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아직은 싸늘한 2월 중순이었지만 요목조목 싸놓은 짐을 나르다 보니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병태는 짐을 나르기가 힘들어 영철이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1월부터 컴퓨터학원에 다닌 영철은 컴퓨터의 기능에 매일 탄복해 하며 병태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7개월만 지나면 자격증을 딸 수 있다며 취직한 후 한턱 내겠다고 했다.

미정과 병태는 다시 밝아진 영철이를 보며 흐뭇해 했다.

셋의 움직임으로 방을 꾸며 놓으니 그럴듯 했다.

책상과 비닐 옷장이 들어가면 딱 들어 맞을 폭과 세 명쯤 누워 뒹굴 수 있는 작고 아담한 자취방이었다.

영철이가 눈치를 보며 빠져나간 후 미정과 병태는 한바탕 말다툼을 했다.

병태는 수술부터 하지 왜 이사부터 했냐고 핀잔을 주자 미정이는 병태가 너무 이해를 못한다며 투덜댔다.

『생각 좀 해봐. 수술하고 나면 짐은 누가 옮기고, 주인 아주머니는 언제 집 비우나 눈치 주는 데 누워있을 수 있어? 그 몸으로 어떻게 집 보러다니고 』 『네 몸이 걱정이지. 이사하고 정리하다 보면 한 달이 더 지날텐데. 그동안 애기가 더 커져 수술이 힘들면 어떻게 하니?』 『너는 내 걱정하려면 제대로 해봐』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거야』 또 그렇게 툭탁거리다가 일주일 내에 같이 병원에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화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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