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문학예술연구회 회원 지난 호에는 시작품을 중심으로 현실주의문학의 현단계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시에 있어서의 현실주의문학이 나아가야할 바는, 노동해방에의 염원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객관현실의 동력을 포착, 시적으로 장악하는데 있음을 논하였다.

이는 물론 시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80년대 후반이래 발표된 「노동소설」과 민족문학의 작품을 보더라도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 또한 「짜임새없는 작품의 구성과 낭만적 전망의 극복」이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실주의문학의 현단계를 「예술의 당파성」을 확보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기라고 보며 그것의 소설적 형태는 참된의미에서의 「장편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실사회의 복잡다단한 연관관계를 총체적으로 작품 속에 형상화하기에는 한 편의 단편보다는 장편이라는 장르가 걸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건대, 80년대 후반 이래 「파업」, 「활화산」, 「함께가자 우리」등 장편노동소설이 등장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앞의 작품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장편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장편소설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원고매수로 나눈다면 모르겠지만, 앞의 작품들에는 장편소설이 담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에 대한 작가적 통찰의 부패를 보여준다.

오히려 추상적인 변혁사상을 현실 속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구체적인 현실의 흐름과 인잔적인 깊이와 넓이 부족한 「사건보고」소설로 떨어지고 있다.

단위사업장의 시야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파업」이나, 나름대로 전국적 시야를 갖추려고 하지만 주인공 재욱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활화산」등의 성과는 현단계 노동계급문화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필자는 이 글에서 과거의 성과를 돌이켜 살펴본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근의 현실주의적 성과를 검토하면서 현실주의 문학의 현주소와 향후의 전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평가대상으로는, 정화진의 첫장편 「철강지대」(풀빛,1991)와 방현석의 중편「지옥선의 사람들」(「실천문학」1990년 겨울호), 신예소설가 김하기와 현기영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객관현실의 총체적인 형상화의 전망을 장편소설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루카치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즉 엥겔스에 의해 정힉화된 「전형적인 상황과 전형적인 성격」의 형상화는 엄밀하게 볼 때 장편소설에 의해서만 진지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현단계 현실주의문학의 「새단계」의 징후를 장편소설에서 찾으려는 백낙청의 시도는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작품으로 돌아가서, 우선 정화진과 방현석을 살펴볼까 한다.

정화진과 방현석은 노동현장의 세세한 구석까지 미치는 실감나는 묘사와 만만치 않은 소설적 무게로 우리에게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 사회의 삶 자체 안에서 생성된 새로운 경향을 포착하고, 이를 현재의 주어진 상태를 능가하는 예술적인 모범으로 농축시키려는 작가적 노력으로써 높이 살만하다.

「쇳물처럼」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정화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체로 일어서는 과정을 (칠성, 천씨) 구체적인 행위의 근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정화진의 소설은 인물과 사건이 빚어내는 갈등축의 모호한 형성과 현실의 내적 논리에 육박하려는 작가적 치열함의 부족으로 아쉬움을 주고 있다.

노동자의 사랑을 다룬 「우리사랑 들꽃처럼」이나 「우리 다시 한번」에서 나타나듯이 사건자체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인물형상화의 미흡함은 앞으로 작가가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가치 평가측면의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첫장편 「철강지대」는 바로 이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엔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깊이를 그 나름대로의 장점인 구체적인 묘사의 뒷받침을 통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상중기에서의 민주노조건설과정과 「노동자로서의 숙명적인 연대감」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형상과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의식의 변모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업현장의 탁월한 소설화와 나름대로의 작가적 의욕을 갖고서 그린 자본가 계급의 형상화는 기록 부족한 면도 있지만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중철, 칠규 등이 어용노조위원장인 김병만과 백준희로 대표되는 회사측에 맞서 「노동자로서의 삶을 향한 깊은 천착은 모자란다고 본다.

또한 사건(「상록회」의 칠구와 승혁을 포함한 노동자의 해고)에 대한 소설적 구성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열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고 하겠다.

대체로 필자가 보건대, 이 작품은 섣부르게 노동해방에의 염원을 표출하지는 않으나, 「노동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을 그리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를 노동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노동운동과 그것의 발전경향에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89년 봄부터 90년 봄까지의 현실흐름을 그린 이 소설은 그 속에 과거 역사도, 미래도 담겨져 있지 않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물과 작업현장의 생생한 묘사조차 다소 감소되지 않는가 싶다.

작품 속에서 내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총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우리 사회의 「변혁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방현석의 「지옥선의 사람들」은 남해안의 해표조선소에서 일하는 선진노동자들의 투쟁과 동지애를 다룬 작품이다.

대체로 방현석의 소설의 발전과정은 초기 「새벽출정」에서 보여준 「보고문학적 요소」의 극복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작가 특유의 탄탄한 문장과 만만찮은 묘사력은 그의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적 가능성(대공장노동자의 투쟁과 정서의 형상화)을 보여주고 있긴하나, 인물성격의 보고문학적 접근과 주요 사건(활동가 민호의 이탈)의 극적 갈등구조의 취약으로 인하여 세부 디테일이 작중 상황에 녹아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테러와 자본가의 음모 속에서 성장한 노동자 의식을 추상적 전망에 기대는 것 또한 현실주의문학의 현단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물론 이 점은 「내일을 여는 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노동자의 동지애를 「운명적 연대」로 파악, 일상적깊이까지 확대심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민족문학권의 김하기의 소설은 좌익장기수 주변 이야기를 「사실보고적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데뷔작 「살아있는 무덤」과 「뿌리내리기」등의 작품은 좌익장기수들의 「과거의 경험」을 회상조로 보여준다는 인상을 줄뿐 작중의 젊은 인물들에 의한 경험과 각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장기수의 과거의 투쟁이나 지고고결한 인품을 영웅화시키는 「옳지못한 주관의 개입」이 문제시된다고 하겠다.

요컨대 김하기에게는 현재의 현재성을 포착하지 못한 채 과거경험의 영웅화로 봄으로서 문제시된다.

하나의 사건 속에서 한 인물의 운명을 폭넓게 보여주려는 현실주의적 치밀함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주목할만한 단편이 현기영의 「거룩한 생애」가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일제말에서부터 4.3항쟁까지 우리 민중의 고난의 현대사를 잠녀 「간난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절제된 언어와 생기가 감도는 역사의 주체인 당당한 민중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민중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깔린 수작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의 민중의 투쟁은 순계급적인 문제뿐 아니라 민족적인 항거와 맞물려있다.

이는 대체로 제주도 4.3항쟁을 다룬 소설의 경우, 추상화된 인간일반의 문제로 될 위험이 있는데 이 소설 또한 그러하다.

즉 이는 자기 테두리 안에서만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닌 현실대상에 대한 치열한 작품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겠다.

제한된 지면의 부족과 핀자의 의욕이 앞서 꼼꼼하게 작품에 대한 분석에 근거한 현실주의학의 현단계를 제대로 살펴보았느지 매우 의문스럽다.

그러나 「예술의 당파성」의 이득읗 야한 길을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적인 변혁사상과 그서의 실천운동과의 굳건한 결합에 초했을 때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서의 형태는 참된 장편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현실에 대한 내적판담과 현실흐름의 내적논리를 투시하려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질의 문학으로서 「예술적 당파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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