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영화제작소의 「하늘아래 방한칸」을 보고

『손끝이 부르트도록 봉투를 붙여도, 어깨가 내려앉도록 막일을 해도 방세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가 사람이여?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 있는 놈 밑구녕으로 다 들어가는 시상이 어찌된 것일까이』 민자당 창당과 더불어 번드르하게 시작한 「희망(?)의 90년대」는 이같은 절절한 통곡을 외면한 채 10명이 넘는 도시빈민들을 자살로까지 내몰았다.

집값폭등으로 전세값을 낼 수 없어 엄동설한에 나 앉을 수 밖에 없었던 도시 서민들. 그들의 외침은 우리에겐 너무나 먼 곳에서 들여오는 희미한 악몽같은 것이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한겨레영화제작소는 지난 봄부터 시작한 16밀리 극영화 「하늘아래 방한칸」의 제작을 끝마침으로써 조용히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아래 방한칸」의 주인공 명구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는 「노가다」로 가정을 단란하게 꾸리며 사는 건실한 가장이다.

비록 집이 닥지닥지 붙은 산동네 단칸 셋방에 살고 있지만 밝은 내일이 있음을 믿고 이웃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당못할 집값폭등의 회오리 바람 앞에 그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발가벗기워진다.

「더 낼 것이냐, 나갈 것이냐」를 강요하는 냉혹한 사회현실 앞에 이리 뛰고 저리 굴러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주위의 차가운 외면과 한숨 뿐이다.

그러나 이런 그 앞에 펼쳐진 도시의 네온싸인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너무나 휘황찬란하고, 부잣동네 담벼락은 성채처럼 높고 견고하기만 해, 상대적 박탈감과 암담함을 느끼게 한다.

『형님,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남들 다 내는 그 흔한 재산세 한번 내보는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악순환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걸 어떡합니까?』라며 설움과 한을 안고 죽음을 선택한 동료, 경숙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주인공은 마침내 경숙아버지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에 죽음을 당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내용의 영화 「하늘아래 방한칸」. 내집 하나 장만 못하면서 남의 건물만 짓는 평범한 한 일용노동자의 고뇌에서 우리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설움과 분노로 김치찌개를 안주삼아 슬픈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자신이 일하는 공사장 건물벽을 헤머로 부수며 한을 달래는 용구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직장수입을 한푼 안 쓰고 모아두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집값 폭등, 서민들의 기본적인 살 권리를 위협하고 벼랑 끝으로까지 내모는 집값 폭등의 근원지인 거대한 뒷손에 대해,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는다.

즉, 본질적 문제인 토지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고, 현상적인 전세값 폭등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을 잔잔한 흐름속에 사실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깊은 감동과 문제의식을 느끼게 해준다.

하루살이 생활속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집없는 서민들에게 피투성이 희망을 딛고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을 이룰 해방 그날이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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