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대 물리학과의 아무개 교수가 <조선일보>에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한 일로 잠깐 화제가 됐다.

주한미군과 미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아메리카를 사랑한다’는 맺음말을 본국어(영어)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돋보였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오늘의 지식층을 비난했는데, 조선일보를 매개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식과 기술의 기이한 결합까지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있으며 공인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프랑스 극우파 국민전선당의 제2인자인 브뤼노 골리쉬도 이런 점까지 부러워하진 않을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대학 교수가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우리는 조·중·동에 동원돼 무지를 자랑하는 대학 교수들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이 단순한 가십거리나 허탈한 서글픔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은 한국 땅에서 대학 교수가 갖는 상징자본의 무게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조·중·동이 무지한 대학 교수들을 동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회가 한국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때, 한국사회에 대해 올바른 비판의식을 갖기는커녕 아예 무지하기까지 한 대학교수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문제임은 물론 한국사회에 지식인의 층이 얼마나 얕은지를 드러낸다.

이 점은 시인과 초·중·고 교사들은 물론 정치인들까지 지식인층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 사회와 슬픈 대조를 이루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교육과정에서 ‘문사철’을 중요시해 사회구성원들에게 사회문화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대신 경쟁과 능률을 강조한 권력과 자본이 교육을 파행으로 몰아간 결과라 할 것이다.

실제로 오랜 동안 국가주의 교육이 관철된 우리의 제도교육 과정은 올바른 상황 인식을 갖춘 지식인을 배출하는 대신 무식한 지식층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무식한 대학생들이 그 구체적 예이다.

대중을 떠난 지식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고 할 때, 올바른 상황 인식이 지식인의 일차적 조건이 되는 까닭은 권력과 자본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대중과 끊임없이 만나고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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