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시대성 혼재한 다양한 사상 존재… 우리 사회의 특성 이해해야

작년 12월19일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대규모 지지 운동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사례를 일각에서는 한국 사회가 탈근대로 가는 증거로 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월드컵 기간 동안 전국을 열띤 응원으로 뜨겁게 달궜던 ‘붉은악마’나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역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근대성을 벗어나고 있는 증거라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 철학을 연구하는 모임인 수유연구실의 이진경 연구원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탈근대성이 드러난다고 해서 탈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대는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으로 대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대 김상환 교수(철학 전공)는 “오늘날 인문주의에 관한 물음들은 ‘종언’의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며 “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 모더니즘의 종언, 이데올로기의 종언, 서구의 몰락 등이 바로 그런 주제들”이라고 설명한다.

탈근대 역시 근대 이론이나 사상의 한계 시점에서 출발한다.

탈근대, 즉 ‘근대를 넘어선다’는 것은 기존의 지배적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과의 차이를 정립하는 일이다.

여기서‘넘어선다’는 말은 발전·진화 개념이 아니라 기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것을 뜻한다.

탈근대적 건축이 고전주의적 성격을 띠듯, 탈근대는 오히려 과거로의 복귀를 추구하기도 한다.

우리 학교 한국여성연구원 김애령 교수(여성학 전공)는 “탈근대 논의에 앞서 근대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근대화를 국민국가 중심의 민주화·산업화 과정으로 이해할 때, 근대에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복합돼 있다.

근대 문화는 욕구의 실현이 목적이라는 면에서 개인주의적 성격을 갖는 반면 실현의 방법적 측면에서는 집단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이에 비춰볼 때 앞서 제시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운동이나 붉은악마 역시 개별적 욕구의 달성을 위해 이뤄진 집단 활동으로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붉은악마에 드러난 민족주의나 전체주의는 봉건적이라는 평마저 나왔다.

이렇듯 같은 현상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근대와 탈근대가 잇닿아 있는 데서 비롯한다.

근대와 탈근대는 고대 이후 중세가 되는 식의 시간에 따른 흐름과는 다르다.

탈근대는 시간적으로 근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현상들의 총체이다.

우리 사회의 탈근대성은 근대성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근대성조차 봉건성·비합리성 등 근대에서 배격하는 다양한 특성과 섞여있는 것이다.

한일장신대 김영민 교수(철학 전공)는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탈근대의 이분법적 구도를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밝힌다.

우리 사회의 각종 근대적 제도들은 자발적 투쟁으로 얻어진 것보다 제국주의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입된 것이 많아 우리 사회의 특수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을 탈근대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경향은 무리가 있다.

의정 감시·부정부패 방지·숨은 권리 찾기 등의 상당 부분은 서구적 신사회운동 영역이 아닌 과거 정치적 민주화운동 영역의 확대라고 볼 수 있다.

또 우리의 오랜 국가주의적 전통 때문에 국가는 아직도 강제적 세금 징수 활동을 통해 자원 배분에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김영민 교수는 “근대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학문을 재구성하려는 노력 없이 우리 사회의 자생적 탈근대론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탈근대적 담론이 대두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근대와 탈근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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