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라는 현재의 억압적이고 구속적인 정체성을 만든 역사에 균열을 내자! 이번에 새로 창간된 반년간지 「여/성 이론」은 이와 같은 모토를 내걸고 모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의 실질적인 연구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여성과 문화」,「또하나의 문화」에서 내놓았던 무크지들이 폐간된 후 제대로 여성의 문제를 논할만한 장이 마련되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여/성 이론」에 거는 기대는 사뭇 남다르다.

년대를 여성의 시대라 할 만큼 이시대 여성들의 표면적인 권익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소위 페미니즘이라 불리우는 여성주의 논쟁이 어떻게 진행했는지 생각할 때 그 찬양은 근거를 잃고 만다.

즉 80년대 활발하게 문제제기 여성노동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하에 잠재워졌고 여성의 섹슈얼리티(sexuality)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판매 전략에 적극 응용(?)되었으며 학계에서 논의된 게이­레스비언 담론들은 일회성의 시선끌기로 마감되었다.

이렇듯 90년대에 있어 여성주의는 내·외부적으로 극적인 모순 상황을 겪었다.

이에 「여/성 이론」은 소진돼 버린 여성의 육체와 욕망,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밖으로 끌어내며 그동안의 이론들을 새롭게 정립해 실천의 기반으로 삼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성 이론」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페미니즘과 상호 연관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포스트 모더니즘,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 들뢰즈/가타리의 해체주의, 포스트 맑시즘 등을 페미니즘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여성학계는 이러한 이론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성이나 비판의 입장을 보여왔음에 비해 여이연은 이를 페미니즘의 목적에 맞게 변형, 이론적 개념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앞으로 다른 학문과의 연계를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21세기 페미니즘의 새로운 발전 방향일 수 있다.

창간호「여/성 이론」은 기획특집‘젠더/섹슈얼리티/주체’,기획논문‘글쓰기와 성적주체’,문화 텍스트 분석, 되살아나는 여성‘청 말의 여성운동가 추근’,여성이론가 연구‘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 번역‘조리 브라이도티와 쥬디스 버틀러의 대담’, 서평「여성의 역사」, 페미니즘 사전‘젠더’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획특집<여성주의적 주체 생산을 위한 이론I>에서 고갑희 소장(여이연)은 7·80년대‘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사이에서 벌어졌던 성과 계급과의 논쟁이 지금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임에도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화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남성을 규정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었던 기존의 젠더(즉 협소하고 의존적인 주체로서의 젠더>에서 벗어나 여성주의적 주체로 설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성계급’,‘성정치학’연구를 강조한다.

최기숙 강사(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이인화에 의해 매도되었다고 주장, 혜경궁의 글쓰기가 사적인 자서전이면서 사적인 공식사에 도전하려는 여성 욕망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사라 불리우는 기존의 역사에 도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다.

한편 김수진 강사(서울시립대 사회학과)는 박완서의 작품과 아니예츠카 홀랜드의 「올리비에, 올리비에」를 중심으로 앞서 말한 장르와 국경을 초월한 상호텍스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주유신 강사(중앙대 영화학과)은 98년 관객이 뽑은 올해의 좋은 영화 2위, 최악의 영화 2위에 각각 오른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주유신은 이 작품에서 그동안 오직 남성의 사랑에만 사로잡혀 식민화됐던 여성의 성욕이 주체적인 자아의 욕망으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 기존과는 다르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 유정희 강사(연세대 사학과)는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여성의 역사」통해 그동안의 역사가 남성들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여성의 역사에 대해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의 역사 정립에 힘겨워 하던 우리 여성들에게 여성사의 새 시작을 알려줄 좋은 기회로 기대된다.

「여/성 이론」은 현재 우리의 여성주의(페미니즘)가 어디까지 왔으며 과거 8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여성주의가 왜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 뒤에 「여/성 이론」이 주창하는 것은 80년대로의 희귀도, 그렇다고 과거와의 단절도 아니다.

과거의 것을 이어받은 새로운 이론의 지형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실천 작업들을 모색해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그들이 머릿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재 남성중심의 도그마 속에서 형성된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균열과 함께 그 도그마의 해체, 나아가 여성들이 그 안에서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들을 풀어 나갈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것이다.

「여/성 이론」의 창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 난해한 이론들의 여과없는 나열이나 생경한 구호의 회침은 자칫 「여/성 이론」을 일반 대중여성운동과 괴리시키고 또다시 학술계라는 거대한 벽에 가둔 채 사장시킬 수 있다느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