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 뒤에야 잊을 수 있고 나를 가진 뒤에야 버릴 수 있는바. 나를 본 적 없는데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쌀쌀한 가을 숲에서 나무꾼이 "주워 온" 여자는 기억없는 머리를 흔들며 경험없는 길고 매끈한 열 손가락을 낯설게 응시하며 그렇게 몸부림 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여자는 밤이면 잠든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 누워 밤마다 자신의 창자를 꺼내 씹듯이 고통스럽게 울고, 낮이면 차갑고 어둑한 방에서 끊임없이 실과 바늘을 놀린다.

옷을 짓고 가죽신을 만든다.

떠돎은 가깝고 머뭄은 멀다.

이렇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이야기는 "실 잣는 거미여자" 전경린의 손끝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직조된다.

(끊임없이 실과 바늘을 놀리며 옷을 짓고 신을 만드는 텍스트 속의 여자는 글을 자아내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여자로서 글을 쓰는 작가의 자아성찰이기도하다) 무대는 여전히 신화의 공간이고 여자와 남자는 여전히 떠나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의 갈등 속에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지만 물론 직조물의 겉은 완연히 다르다.

시퍼런 칼날에 스윽 베이 듯 무섭고 고요한 감정의 하강,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는 시선에 응고되는 삶으 구비구비. 그렇다.

전경린의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늑대는 "두려움을 사랑하고 두려움을 벗으로여기며, 칼날같은 좁은 두려움의 길을 걷는 저 늑대는 나무꾼이 주워다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만들어 버린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그려내고 있는 전경린이라는 한 여자의 언어 그 자체이다.

전경린의 글은 우리가 어느날 삐끗 발을 잘못 디뎌 빠져버리게 되는 깊고 깊은 검은 웅덩이이다.

그 느닷없음을, 갑자기 목도하게 되는 그 존재의 이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적으로 "검은 마법"을 닮은 그녀의 언어는 특히 이 신화의 공간에서 일체의 지시적. 재현적 과제의 부담을 벗어버리고 홀로 차가운, 두려운 존재로 숨쉰다.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늑대 인간>의 평범한 모티브를 짜집기 해서 만든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그렇다면 단순히 괴기스러운 아우라에 가득찬 언어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가? "이녘을 행복하게 해 줄게"라는 주문을 외우며 여자를 자기와 자기 후손의 존재의 집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남자를 잡아 먹고서라도 자신의 본래 자아인 늑대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여자의 이야기는, 그러나 본질이라는 미스테리의 심연에 빠져버리지 않을 때 마술적 언어의 수학을 넘어서는 일정한 의미의 문맥을 담아내는 실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여자 전경린은 중독된 듯, 엑스타시에 빠진 듯, 계속 실을 뽑아낸다.

그래서 이렇게 쓴다.

"양팔에 감자같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쥐고도 늘 굽어진 길의 끝을 바라보는 잠들지 않은 야생...여자에게는 손가락이 터지며 기워야 할 자신만의 실과 바늘이 있다.

..자궁이 세대를 영원하게 하듯, 가죽신은 여성을 근원으로 인도한다.

그대의 가죽신은 무엇인가. 여자는 삶보다 더 숭고하다" 이제 실은 필요이상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자는 삶보다 더 숭고하다라는 부분을 잘라낸다.

바늘과 실을 바탕으로 쌓은 열 손가락의 경험, 스무고개를 천번이라도 넘을만큼 충분히 쌓인 가죽신, 이 경험과 가죽신으로 여자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 않는가.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외면한 채 살아야 했던 "나쁜 꿈과 같은 삶"에서 깨어나 이제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이지 삶 저편의 숭고함이라는 초월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아니다.

삶 저편의 숭고함이야 말로 정말 지나친 신비주의 지나친 수사학이 아닌가. 수사학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라면 손가락이 다 부르트도록 그렇게 밤이고 낮이고 가죽신을 만들 필요는 없으리라. 여성성 또는 여성의 삶은 그렇게 손쉽게 존재내 본질의 수사학으로 환원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삶의 맥락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고 형성되는 것이지 어떤 영원한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본질을 아니지 않는가. 여성성이 본질로 남아있는 한, 선녀를 "주워다" 집을 짓는 나무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나는 전경린이 "검은 마법"을 닮은 그 뛰어난 언어를 담보로 정념과 괴기의 여성작가라는, 남성 평론가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수사학의 검은, 진자 검은,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여성성은 겪어진 운명이 아니라 형성되고 획득되는 대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을 바로 그 언어의 힘으로 힘겹게 구체적으로 고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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