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1백대 경제력을 꼽으라면 그중 47개는 국가가 아니라 초 국적기업이 차지한다.

구중에서 가장 막강한 10대 초국적기업의 매출액 합은 1조 4천억 달어에 달하는데 비해 가장 가난한 나라 10개의 국내총생산 합은 2백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렇듯 아이엠에프나 초국적기업과 같은 거대한 자본의 권한은 한 나라가 취할 수 있는 정책과 실행의 범위를 제한하는 ‘시장의 세계화’로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자유시장의 기치아래 진행되고 잇는 전세계적 경제통합은 정치적 변동과 함께 한다.

지난 20여년간 군부독재나 일당독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민주화된 나라는 많아졌지만 각 국민국가의 권한과 정통성은 낮아지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와 초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세계시장의 등장은 인류에게 끔직한 사회적 후유증을 안겨다 주었다.

가장 심각산 것은 갈등과 분쟁의 지구적 확산과 그 성격의 변화이다.

시장자유화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시장의 자유화와 불편등의 심화는 다양한 분쟁의 공통된 원인과 연관돼 있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르완당서 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와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의 도입은 지역간·족간·종교집단간의 갈등·충돌과 직결돼 있다.

브라질의 리오에서부터 영국의 맨체스터에까지. 태국의 방콕으로부터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까지 모두 범죄와 폭력의 증가를 경험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지배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보스니아의 비극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보스니아-헤체르고비나에서의 전쟁과 참상은 마치 민족간 갈등이 전부인 양 알려져 있어 그 경제적 배경은 은폐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일찍이 동유럽진영으로부터 탈퇴해 서방과의 경제협력을 시작한 나라였다.

이 과정에서 유고의 서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은 먼저 산업화되고 부유해진 반면, 세르비아와 코소보 지방은 농업중심의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 됐다.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는 70년대 많은 왜채를 도입했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차관의 조건에 따라 구조조엉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됐다.

그러나자 경제성자은 멈춰 버렸다.

외채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경제불황이 닥친 상태에서 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자 유고 서부지역은 연방으로부터 탈퇴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세르비아 인들은 사태의 경제적 결과를 예측하고 연방군을슬로베니아로 보내 탈퇴를 막으려 햇고 그 이후의 비극은 인류의 상상을 초월한, 부끄러움의 역사로 기록돼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분쟁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심한 경우 무역자유와 조치와 탈규제화 조치는 제한된 자원에 대한 집단간의 경쟁을 극단화시키면서 국가의 조절력을 마비시킨다.

현재 알제리에서 발생하고 잇는 분란은 극심한 외채압박, 그리고 이채상환을 위한 자원조달과 관련돼 있다.

이제 분쟁과 전쟁은 국가간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약탈·민간인학살로 대표되는, 자원을 둘러싼 목숨 건 생존경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주민(인디언)에 대한 아메리카 개쳐ㄱ자들이 모셨던,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이제 “자유화”라는 상표로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싶어하는 정글의 원리가 지구촌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장세계화는 범지구적·문화적 도전히기도 하다.

선직국 초국적기업의 이해를 쫓아 추구되는 ‘시장경제’와 정보기술의 확산은 지역 문화와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기도 한다.

일본 소니그룹의 창시자 아끼오 모리따씨는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외부로부터 침투하고자 하는 세력에게는 비관세 장벽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까지 말했다.

레게음악과 문화로 전세계를 움직이고 거리 패션의 변화를 가져온 쟈미이카와 같은 작은섬나라는 독특하기 대문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가 그ㅌ날 무렵 전세계 언어의 90%가 소멸될 것이라는 예측에서나 ‘타이타닉’의 세계제패에서 보이듯, 그리고 70개국 2억8천만가구의 눈과 귀를 단 하나의 언론사가 장악할 수 있듯, 시장 효용성을 가진 문화상품만이 생존하는 상황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사람들은 그 어떤 것보다 소비제품의 상표이름으로 서로 연관성을 느낀다”라는 코카콜라사 사장 로버트 과주에타씨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니카라과의 한 지역운동가는 “지역의 해체를 대가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통합”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역설적인 말이다.

지금의 세계적 통합은 ‘하나로’되는 통합이 아니라 ‘깊은 불신의 골에 갖힌’ 통합으로 되고 있다.

깊은 불신의 골은 멕시코의 사비티스타 농민 봉기에서 한국의 노사정위원회의 파단에 까지 이어진다.

‘자유’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신자유주의 시장공세가 ‘자유의 근거’를 파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의 자기파괴성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자유의 확대는 결국 적절한 조절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기 파괴적인 이념이라는 낡은 지적을 이제 무한정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는 초국적기업에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화된 저하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역설은 모순과 저항을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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