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사태"인가, `항쟁"인가? 오랜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잇는 이 사건의 역사가 올해로 50돌을 맞았다.

그러나 50년이 지났어도 4.3항쟁은 여전히 `항쟁"이 아닌 `사태"로 남아 있다.

48년 당시 제주민들은 한번도내 2개 적대국가 출범 이후 남한내 극우세력 확장과 좌익인사 제거를 꾀했던 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정치·이념적 야욕 아래 무차별 학살되던 중 무장대를 조직, 미군경찰과 극우세력에 대항했다.

항쟁은 6년6개월동안 지속됐으며 5백여명으로 추산되는 무장대를 전멸시키기 위해 토벌대는 3만여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항쟁은 그저 우국인 미제의 도움으로 제주도에 만연했던 빨갱이 세력을 소탕하던 중 발발했던 사태로 인식되고 있다.

철저한 자유주의·자본주의 옹호를 통한 정권의 정당성·정통성 확보를 위해 제주항쟁은 불순한 이데올로기로 세뇌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의 반동으로 왜곡돼 있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의 올바른 평가속에 현실을 투영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통용되지 못하는 사회-이는 단순히 역사의 한 시점이 곡해되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 현 권력자들 또한 국민의 반공의식을 이용, 편향된 이념 탄압을 자행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정체를 초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제주항쟁을 재인식함으로써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 활발하다.

특히 학술 계간지 역사비평에서는 `전후 냉정의 시작과 민중학살"이라는 주제로 제주 4.3항쟁을 비롯해 이념싸움 및 탄압이 극심했던 대만·그리스·오끼나와의 참사를 다루고 있다.

대만의 백색태러와 그리스내전, 그리고 미군정의 오끼나와인학살은 모두 제주 4.3항쟁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후 우위를 점하게 된 자유진영의 `빨갱이"소탕 정책에 저항한 민중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선 대만의 경우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속에 치열한 이념전쟁을 겪어야만했다.

1945년 8월16일 일제치하에서 해방돼 중국 민족경제권에 편입된 대만은 국공내전 격화에 따른 대륙의 인플레로 극심한 경제 혼란과 정치·사회적 불안이 만연해 있었다.

르포라이터 란보조우는 "1947년 2월28일 대북시에서 발생한 관민충돌은 대만 전체의 민중봉기로 확산돼 나갈 수 밖에 없었고 1950년~54년 미국의 `잠재적인 것과 드러난 미국내부의 적"에 대한 숙청 바람- 매카시즘에 힘입은 국민당은 공산당 말살을 위해 가리지 않고 민중을 학살했다"고 서술한다.

그는 당시 정치사건 중 공산당관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가장 많은데 비해 대만재해방연맹 대만지부 사건에 관해서는 제일 무거운 형기가 12년에 그쳤던 점 등으로 미뤄볼 때 대북국민당정부의 백색태러정책의 주요목표가 좌익인사 제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렇듯 이념대립의 불안감을 민중학살로 해소하고자 했던 방침은 같은 동아시아권에 속한 오끼나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51년 일미강화조약. 52년 일미행정협정에 따라 미군점령하에 놓이게 된 오끼나와에서는 미군의 자의적인 포령·포고의 남발 때문에 어떠한 `법"에 의해서도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시인 가와마치 신이치는 민중들을 멧돼지인줄 알고 사살했다거나 수업중인 초등학교에 제트기가 추락해 수많은 사살자를 냈음에도 기장에게 어떤 문책을 했는지조차 발표하지 않는 등 인권문제를 소홀히 했던 미군의 행태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미군의 오끼나와인에 대한 교묘한 탄압 역시 자신들의 이념과 대치되는 세력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미군은 당시 급진적 정당이었던 `오끼나와 인민당"을 공산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감시·선거방해 등을 통해 세력축소를 꾀했으며 신문과 잡지 등 모든 인쇄물을 발행허가제화했다.

또한 극동정세의 긴장을 이유로 각지역에서 총칼을 앞세워 군용지를 강제 접수했고 반항하는 자를 불도저로 밀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한편 그리스 역시 이데올로기 분열로 유혈사태를 겪어야만 했고 이는 영국의 간섭과 함께 비극적인 내전을 초래했다.

포츠머스대학 유럽연구센터 연구원 스피로스 소포스는 자유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극적인 대립속에서 죽어간 민중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의 지배계급이 1922년 군사적 폐배로 민족통일주의이념이 상실되자 반공주의와 방어적 사고를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매커니즘으로 채택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메탁사스정권이 1940년 붕괴됨으로써 재조직의 기회를 맞은 급진 좌파는 민족자유전선(EAM)과 그리스 자유군대(ELAS)을 수립했다.

그러나 1943~44년 ELAS-EAM과 반군주세력인 중립당간의 군사적 대결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그리스 내부의 극우협력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썼고 결국 EAM을 아테네에서 몰아냈다.

이에 대해 스피로스 소포스는 "대립국면이 계속 확산되자 영국과 EAM은 서로 동조혐의자를 체포해 학살했으며 결국 불행한 내전은 좌파와온건한 반자본주의 집단의 총채적 패배로 종식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역사비평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진영의 좌익세력 숙청 작업이 세계전역의 수만은 민중들을 얼마나 초토화시켰는지,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심화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현대를 일컬어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규정하나 마땅히 재인식돼야 할 `항쟁"의 의미가 여전히 `빨갱이의 반란"으로 묻혀져 있는 것을 보면 사상은 아직도 철저히 양분돼 있는 듯하다.

진정 탈이념의 사회라면 다양한 사는 불순한 것이 아닌 발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옳다.

한 사회의 통치나 사회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거은 정권안정을 위한 사상불순분자 제거가 아닌 수용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 이념의 획인화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 앞에 부끄러워 해야 할 범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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