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사학연구소 11월 27일 국제학술대회 개최

이화사학연구소는 ‘근대사회 전화기의 혼인제도의 변화’라는 주제로 11월27일(목) 오후 2시 인문대 교수연구관 111호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중국, 한국, 연변을 중심으로 혼인제도의 변화양상에 대한 발표 및 토론이 진행됐다.

우선 ‘신해혁명 전후 중국이 혼인제도 변화 연구’에 대해 발표한 장건교수(북경대 역사학계)는 신해혁명 시기에 일어난 혼인제도와 혼인관념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장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평등하고도 독립적인 직업, 그리고 가정에서의 여유와 애정을 추구하는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부모가 독단적으로 상대를 정해주는 전통적 혼인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매혼인과 조혼, 축첩제도 등을 반대하며 산아제한, 이혼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여권 의식의 성장은 혼인 절차와 결혼예속에도 영향을 미쳐 혼인절차가 점차 간소화됐고 서구식 결혼의식이 등장하게 됐다.

이에 대해 장교수는 “폐쇄적인 봉건 전통의식과 낡은 혼인습속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인제도의 변혁과 발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러한 변화가 매운 제한적이었음을 밝힌다.

한편 ‘한국 근대사괴 전화과 혼인제도의 변화 ’를 발표한 이배용교수(사학과)는 가족과 혼인제도의 변화를 통해 근대사회 전환기에 여성의 존재와 가치의식, 지위 그리고 그에 따른 갈등양상을 검토한다.

이교수에 의하면 실학사상·서학·동학사상·기독교의 전파는 여성도 남성과 같은 사회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관습 등에 대한 비판이 점차 등장하게 됐다.

이는 1920년대 신여성에 의해 주도된 여성의 자유연애와 결혼, 그리고 보다 평등한 부부관계로의 지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여성 의식의 변화와 함께 1894년에 추진된 갑오경장은 조혼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서얼차별제도 철폐를 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여성들을 둘러싼 봉건적 인습을 타파했다.

그러나 이교수는 “갑오개혁은 일제의 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한국의 전통적·봉건적 법률체계를 온존시키는 가운데 일부 일본의 법률을 이식함으로써 기형적인 법률제도를 만들어 냈다”고 지적한다.

즉 법제적으로 금지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혼의 성행, 축첩의 일반화, 부녀자 매매 등은 그대로 유지됐고 신·구여성 간의 갈등, 일과 가정생활의 양립문제로 인해 여성은 더욱 고통받았다.

그러나 여성의 의식의 신장으로 기존의 억압굴레에서 벗어나 적극적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중국문화와 한국문화가 혼재돼 있는 연변의혼인제도는 어떻게 변화됐을까? 채미화교수(연변대 주문학계)는 ‘중국 조선족 혼인사 변천과 현 실태’에서 조선족 혼인사의변천을 민족의 전통문화와 대륙문화의 충돌과 조화속에서 이루어진 가치확립이라고 전제하며 조선족 혼인 실태를 규명한다.

해방후 조선족 사회에서는 참다운 애정과 행복의 추구에 혼인의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재혼율을 증가시켰고 산아제한 정책의 실시로 가족의 소규모화가 급속히 이뤄졌다.

이에 대해 채교수는 “현재 혼인관념에서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지나친 추구는 자녀 출산을 꺼려하는 여성의 급속한 증가를 가져와 조선족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혼인을 일종의 물질교역으로 간주하는 금전지상주의 혼인과, 남존여비의 봉건주의적 혼인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근대 전환기 중국, 한국, 조선족 여성들의 의식변화는 전통적인 혼인과념 및 혼인제도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앞으로 이러한 과정속에서 나타난 역기능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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