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방학, 친구의 권유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정주행했다. 활자형 인간으로서 처음에는 보면서도 이걸 내가 끝까지 볼까? 긴가민가했는데 어느 순간 유튜브 리뷰 영상들까지 찾아보고 있었다. ‘슬의생’ 리뷰 영상들에 빼놓지 않고 등장했던 장면이 있다. 5화 막바지에,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기쁨에 찬 아버지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나도 그 장면을 보며 뭉클했던지라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에 이렇게 가슴 벅차하는 걸까?

그것은 생명이 인간의 존귀함을 다루는 최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상처만 주었던 부모일지라도, 나쁘게 헤어진 친구라도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되는 것처럼, 한때 맹렬히 비판하던 악인도 비참하게 죽었다고 하면 씁쓸한 것처럼 우리는 ‘생명은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전제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원수도 용서하고야 만다. 우리가 생명의 가치에 공감하여 박애를 느낀다는 것은 하나의 함의를 갖는다. 나에게 관대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내 생명의 가치에 공감해 본 적 없어서라는.

올해 1월 1일, 본가 인근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코로나19로 주요 해돋이 장소 방문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공고가 유명무실했던지 도시고속도로는 자동차들로 꽉 차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30분 조금 넘게 걸렸을 길에 한 시간 조금 넘게 갇혀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명치께가 심하게 아프더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태어나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기침이 날 만큼 숨이 가빴는데 내가 있는 곳은 구급차도 못 올 꽉 막힌 고속도로 위였다. 그때의 공포감이란! 다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다행히 상태는 2~3분이 지나니 조금 나아져서, 119에 전화해서 대충 상황을 설명했는데 구급요원께서 설명하는 내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당장 급하진 않아 보인다며 가까운 응급실 목록을 문자로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당연하다. 대체 어느 위급한 환자가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 또박또박 설명하고 있겠는가?) 하지만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나갔을 때쯤 나는 말짱해졌고, 응급실에 가 봤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별 검사를 못 받을 거란 엄마의 말에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병원에 가서 순환기내과 진료를 받았다. 심전도 정상, 혈액검사 정상, 청진해 봐도 이상 없음. 어떤 소견도 그날의 해프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백신 부작용이 아니냐며 걱정했고 나는 나대로 원인이 규명되지 않으니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무서웠다. 조금만 심장이 빠르게 뛰어도, 머리가 아파도, 하다못해 다리에 쥐가 나기만 해도 불안했다. 작은 이상에도 심각한 병일까 봐 무서워하는 게 겁쟁이인 나로선 정말 힘들었지만, 대신 그간 강박적으로 지향하던 어떤 이상적인 모습도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관대함이 생겼다. 원래는 항상 상냥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려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벼락치기를 하다가도 졸려 죽겠으면 그냥 좀 자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어하는 티도 좀 내고, 다 같이 어울리는 자리여도 피곤하면 빠지고. 그렇게 살고 있다. 조금 덜 야무지게, 덜 상냥하게, 덜 당당하게. 그런다고 딱히 이룬 것들, 사귄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더라. 오히려 내가 꼭꼭 숨겨 오던 약점들을 고백할 때마다 너무 태연하게 “어, 근데 그래 보였어.” 하던걸. 이런 걸 보면 미약하게 갖고 있던 연기자의 꿈이 어릴 때 꺾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번 학기에 듣는 교육공학과 전공 강의 중에 ‘요구분석론’이라는 강의가 있다. 어떤 기관의 목표 지점(to-be)과 현재 상태(as-is)의 간극을 찾고 개선하는 것이 요구분석인데, Case study를 하다 보면 저자들이 정말 많은 한계점을 고백한다. 조사 과정에서의 한계, 적용의 한계, 일반화의 한계…. 전문가들이라도 완벽하게 연구를 수행할 수는 없다. 삶은 결국 ‘나’의 현재 상태(as-is)를 분석해서 지향점(to-be)으로 다가가는 연구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다만 전문가들이 기를 써서 하는 요구분석 연구도 한계점을 갖는 것처럼, 우리도 “어, 근데 그래 보였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아지는 것은 본디 어렵다. 그림 한 장 그리면서도 이미 칠한 색을 바꾸기 힘든데 하물며 나를 다듬는 일에는 오죽하겠는가? 내가 바라는 모습(to-be)과 현재 상태(as-is)의 간극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조금 부족한 나 역시 용서하고 귀히 여기어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가 나를 용서하기 전일지라도, 나는 그냥 나대로, 나의 실수를 용서하면 된다.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도 괜찮다. 다른 사람들만큼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으면 좀 서툴게 살자. 설령 그 결과 꼭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 좋다. 우리는 이미, 단지 ‘살아 있음’으로 존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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