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목소리를 드릴게요

출처=알라딘
출처=알라딘

오랫동안 유토피아(Utopia)를 생각했다.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존재할까? 관념의 모습이든, 실재의 모습이든 유토피아의 존립 가능성과 건설 방식에 관해 고민했다. 이 글은 정세랑 작가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고 썼다.

인간은 최초의 유토피아인 어머니의 포궁으로부터 세상이라는 디스토피아(Dystopia)로 추방된다. 따라서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의 회귀를 바란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매 순간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멈추는 순간 죽음이니 말이다. 인간의 탄생이 낙원에서 지옥으로의 진입, 그리고 죽음이 비로소 지옥에서 낙원으로의 재진입이라는 점은 우리 삶의 역설을 묘사하는 공식과도 같다. 도처에 죽음. 우리의 운명이 이토록 처절했던가.

이런 질문이 생겼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가 그 자체로 이상이고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라 말해놓고 이제 와서 다시 찾는다고? 모순적이다.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 자체가 우리 삶이고, 모순을 살지 않기 위해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없는 곳’이라 공공연한 유토피아를 어떻게든 찾아보려 한다.

모두가 상생하고 공존하는 유토피아는 실재할 수 있는가. 그런 세상은 꿈에라도 존재할 수 있는가. 누군가 상상할 수 있는 젠더는 어딘가에 분명히 실재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없어 괴로웠다. 그래서 환상소설을 읽었다. 환상은 곧 우리의 꿈. 그리고 우리의 꿈은 유토피아이다. 그렇다면 ‘환상소설’이란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소망을 환상으로 구현하려 분투하지 않을까.

정세랑 작가의 환상소설에는 비뚤어진, 병든, 이상(異常) 현실이 등장한다. 김규림 평론가는 말한다. “세계는 어딘가 잘못됐고,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주인공이 거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온갖 고생을 하지만, 그건 그냥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상 현실의 병든 부분을 해독할 치료제는 무엇인가. 정세랑 작가가 내민 해독제는 바로 ‘사랑’이다.

‘한 사람이 세상에 미치는 유해함. 그리고 세상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유해함’이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하나의 유해함 때문에 모두로부터 격리되는 부조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세계에서 이 부조리함은 ‘수용소’에 갇힌 ‘괴물들’의 부자유를 통해 드러난다. 소설의 주인공 ‘승균’은 이제껏 ‘제 자신이 세상에 미치는 그 유해함’ 때문에 세계와 평생 친해지지 못한 주제에, 세계도 아닌 단 한 사람 ‘연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덜컥 목소리를 제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를 구하기 위해 보여주는 행동은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해 타인을 제거하는 혐오가 아닌, 타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나의 한 부분을 없애는 용기. 이것이 바로 작가가 ‘사랑’이라 말하는 무엇이다.

‘하나만을 위한 마음으로 내 것을 버리는’ 사람이 괴물로 분류되는 이상(異常) 현실에 사는 사람들. 결국 이 난세를 구할 영웅의 무기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괴물을 가둔 수용소조차도 사랑으로 구원받을지니, 부조리한 현실은 공격으로 패배하고 사랑이 무기인 영웅은 수비로 승리할지어다... 그래서 그렇게 ‘믿음, 소망, 사랑’을 외쳤던가. 이상(異常) 현실 밖에 이상(理想) 현실이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 그 소망을 현실로 만들 무기는 사랑.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그리하여 이런 것이다. 옆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사랑이 상식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내버려 두는 세상. 때로는 대의를 위한 움직임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움직임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세상.

나는 유토피아를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우리들이 모두 환상소설의 ‘영웅’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혹여 영웅이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연선’이 ‘승균’을 구했던 것처럼, 그리고 다음엔 세상이 버린 ‘연선’을 ‘승균’이 다시 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은 또 다른 우리의 사랑을 부르고 그렇게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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