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자격증 시험 전날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두 달을 쏟은 공부였고 해당 분야의 ‘취준’을 위해서라면 으레 따고 간다는 자격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입국 허용 소식을 들을 줄이야.

불과 하루 전, 계속된 입국 금지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막학기생은 눈물을 머금고 교환학생 파견 포기서를 냈다. 포기 각서를 낸 다음 날 새벽, 입국 금지가 풀렸다는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 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하루 차이로 운명이 바뀌었다. 타이밍이 참 얄궂었지만 나의 사정을 설명해도 예외는 없었다. 마침 공부하던 곳이 자유열람실이라 다행이었다. 사람이 없어서 조금 훌쩍거려도 폐를 끼칠 일은 없었으니까.

입학허가서를 받은 뒤 교환에 대한 기대로 몇 개월을 지내왔다. 입국 금지, 허용, 다시 또 금지... 기대감이 차오르고 싹 빠지길 몇 번,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고대하던 무언가가 텅 비었을 때의 상실감은 종종 ‘나한테만 왜 이러지’, ‘인생이 다 이런 건가’라는 자극적인 문장으로 내 안에서 확대되고 왜곡되기 바빴다. 교환 때문에 날린 여러 기회비용은 종종 떠올라 나를 힘들게 했다. 자기연민으로 가는 것만은 막고 싶었지만, 이젠 쓸모없게 된 재류자격증명서와 추천서, 교환교에서 온 “残念ですが,”(유감이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볼 때 끝도 없이 씁쓸해지는 감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딱 이맘때쯤 나를 잘 모르는 타국에 가서 마음껏 쉬고 싶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문법에 맞는 문장을 생각하느라 바빠지고 싶었다. 여긴 말이 잘 통해도 너무 잘 통하잖아. 김포에서 제주도 말고, 국제선을 탈 때의 긴장감을 느끼고 싶었다. 비행기 안에서 신고서를 작성하고 배웠던 일본어로 더듬더듬 길을 묻는 것조차도 그리웠다. 내가 북마크해둔 카페와 소품샵에서 시간이 간다는 압박조차 없이 느긋하길 원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낯선 동네를 산책하고 싶었다. 카메라를 마구 챙겨 가서 필름을 질릴 때까지 찍어대고 싶었다. 교환교의 인연들과 후회 없을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그렇게 6개월만 이방인인 듯 아닌 듯 살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년만.

하지만 여기는 서울이고, 나는 18학점에 허덕거리며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달라진 것은 잘랐던 머리가 맘에 들을 정도로 길어졌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자면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작년까지 철학 수업을 학기마다 하나씩 들어왔다. 당시 철학을 접하며 느낀 건 내 세계가 참 좁다는 사실과 생각하는 건 힘들다는 감상 정도였지만 나는 이럴 때 종종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철학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니체를 좋아했다. 철학 복수 전공을 하는 친구가 치킨을 먹으면서 ‘아모르 파티’(Amor Fati)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가 그렇고, 스터디에서 만난 팀원들이 니체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그랬다. 자신들의 삶에 니체의 말이 위로가 된다고 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 싶었던 나는 3학년이 시작하자마자 패기 있게 니체 수업을 신청했다.

장난스럽게 외치던 아모르 파티의 진가를 그때 알았다. 세상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은 무수히 많다. 내가 노력한 흔적, 쏟아부은 시간이 우습다는 듯이 ‘운’이라는 거대한 운명은 종종 우리를 놀리는 것 같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이러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니체는 우선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나의 환경과 조건은 물론이고 괴로움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까지 말이다. 얼핏 이 말은 ‘어차피 모든 게 정해져 있으니 넌 할 수 있는 게 없어’라는 허무주의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는 운명을 수긍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필연적인 힘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분투하는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무엇 하나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도 자기 뜻대로 이뤄내고자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증거다. 이것이 처음 말했던 니체의 아모르 파티(운명에의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한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일어설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분투했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를 사랑하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씁쓸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금껏 포기한 것들이 종종 생각나기도 한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울어서 상대방을 당황시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포로 되돌아가니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달려온 과정에서 남은 부산물이 있다. 바로 자신의 욕심과 목표에 최선을 다했을 때 스스로 느껴지는 뿌듯함과 대견함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빈 시간이 찾아와도 다음 단계를 준비할 힘이 있다는 것을, 니체의 말을 곱씹은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고독한 자여, 너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너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경멸을.”

비워냈으니 이제 새롭게 채워 넣을 시간이다. 갖가지 일로 가득할 나의 다음 목적지는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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