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 와 기사로 쓴다. 인터뷰이가 고뇌와 노력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경험을 기사에 싣겠다는 이유로 기자가 갖은 정보를 쏙쏙 뽑아간다. 나도 나 자신이 순간 파렴치한으로 느껴질 만큼 집요하게 그들의 시간을 베껴온다. 인터뷰를 하는 일은 나의 생에 24시간, 365일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의 실패와 성공, 좌절과 환희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사실 이 작업은 기자보다 독자에게 훨씬 쉽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기사를 찾는 사람은 점차 줄어든다. 책보다 짧고 영화, 드라마보다 사실적인 기사가 가장 뒷전으로 밀려난 우리 세대에게 전하는 한 마디, “기사에서 시간을 훔치세요.”

지난해 9월부터 학보에서 취재기자로 일을 시작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인터뷰이의 뼈아픈 실패로 좌절하고 눈물 흘린 과거, 수십 번 쓰러져도 털고 일어난 끈기, 세상의 차별과 주변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은 노력을 인터뷰하는 한 시간 안에 도둑질한다. 수만 가지 수식어를 붙여도 표현되지 않을 값진 시간을 나는 너무도 쉽게 얻었다.

축적된 경험 속 그들의 마음가짐을 보며 용기도 얻는다. 2021년 8월 만났던 최고령 졸업생 전정자씨의 눈빛 속에서 배움의 열정을 느꼈다. 첫 여성 한국지구과학회 학회장으로 선출된 신동희 교수의 깍지 낀 손에서 무거운 책임감과 비례하는 자신감을 느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났던 <미지에서 온 소식> 작가, 문경원 교수의 말속에서 커리어와 작품에 대한 확신이 보였다. 학생 아카데미상 수상자 김수진씨의 온화한 미소에는 단단한 내면이 드러났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기자가 남의 값진 시간 엿보는 행복한 직업이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다. 절대 아니다. 기자인 나는 독자가 부럽다. 독자가 가장 큰 수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인터뷰이가 소중한 시간을 내어 값진 경험까지 내어 준 수고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 한 시간 동안의 대담을 흥미롭게 듣고 있을 사람은 몇 없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인터뷰 내용을 응축한다. 그들의 인생에 쌓인 나이테를 골라 모으고 말투, 표정, 손짓, 눈빛에서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를 기사에 녹인다. 고민하다 쓰고 다시 고민하고 반복하다 보면 12시간은 금방 간다.

그렇게 완성된 기사는 허투루 쓰인 문장 하나 없다.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피드백을 주는 데스크와 부장 기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기자, 교열 보는 기자 여러 사람을 거쳐 과즙 100% 주스 같은 기사를 생산한다. 독자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넣으면서 분량은 최소화한 효율의 결정체를 만나게 된다. 기사를 읽는 짧은 순간에 인생 선배의 60년을 여행할 수도, 석학의 깊은 학문적 고민에 함께 빠져볼 수도 있다.

어느 인터뷰이는 나에게 “젊은이들은 픽션에 열광하고 논픽션에 차갑게 식는다”고 말했다. 나는 발끈했다. 현실감 없이 영화, 드라마에 빠져 산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부터 영화, 드라마를 기사보다 많이 찾아보기에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드라마는 극적 요소를 위해 주인공에게 항상 엄청난 운을 손에 쥐여준다. 현실에는 그런 환상적인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구체적으로 쌓아 올려 사실처럼 만드는 작업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있을 법한데” 생각하는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 현실을 회피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희망찬 미래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야 조금 더 나은 내일이 되는 것이다.

모두의 인생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일주일 전 읽었던 기사는 지도가 된다. 새로운 길로 들어서도 싶다고 결심했을 때도 기사는 친절한 사용설명서가 된다. 인생의 땅바닥에 도착한 순간에도 기사는 동아줄이 된다. 누군가의 실패와 좌절의 순간, 성공과 환희의 과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크게 넘어질까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못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 넘어지는 법이 아닌 툭툭 털고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해도 딛고 일어나 극복하는 법을 기사는 알고 있다.

여전히 나는 분하다. 젊은이들이 기사를 찾지 않는 실태가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기사의 효용성을 알고서도 흥미가 없어 찾지 않는 것일까 두렵다. 기사가 내 삶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기다린다.

기사를 읽는 것이 ‘실현 가능하고 적법한 시간 도둑질’이라는 점을 깨닫기를 바란다. 쉬운 길을 놔두고 혼자 어려운 길을 개척하며 진 빼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이 한 번쯤 생각날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기사를 클릭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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