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강의

키취(Kitsch )는 19세기 후반 뮌헨 미술 서클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론이 있다.

그 첫번째는 영어의‘스케치(scatch)’에 관련시키는 것이고 두번째는 독일어 동사인 ‘키췐(kischen) - 진흙을 가지고 그것을 손으로 문대며 논다는 뜻’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 어원이야 어떻든, 처음에 키취는 산악인들의 토착적 삶, 순박하고 활기찬 모습을 찬미하는 작품들을 지칭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키취는 가치절하의 뉘앙스를 가지게 됐다.

이제 키취는 진정한 미적 가치나 예술가의 성실성이 결여된 - 사이비 - 작품들로서, 신흥 부르조아의 저급한 취미를 만족시켜주는 작품들을 일컫게 됐다.

그래서 키취는 종종‘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운다.

키취는 이발소 벽면에 걸려져있는, 유명 작품의 모작이기도 하고, 싸구려 사진이기도 하고, 아니면 아마츄어의 어서픈 그림 같은 것이다.

키취를 역사적인 전개 과정에서 본다면, 부르조아 사회의 성장과 뿌리를 같이 한다.

‘고급 예술 감상’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신흥계습은 경제적 성공을 성취하자, 취미에의 욕구가 생겨났던 것이다.

아브라함 몰로는 현대를 네오-키취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시대의 사물들은 더 이상 사용가치나 기본 기능에 의해서만 평가되지 않는다.

사물은 장식정인 의식으로 일상 생활을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며, 세련된 삶으로 만들어주는 키취인 것이다.

전총적 고급 예술품들은 액서사리로서, 그리고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도입되고 변용될 뿐 아니라, 모든 생산품들과 일상 자체가 문화적 가치들로 변이된다.

키취현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키취는 사회안에서의 개인의 성공을 확인시켜주며, 누구나 물질적인 키취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기 긍정성을 가져다준다.

이때의 소유물을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을 쾌적감이다.

사람들은 쾌적감, 편안함, 안락함 속에서 상류계급을 흉내낸 그럴듯한 의식성을 자축하는 것이다.

키취는 현대인의 소유물일 뿐 아니라,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에 끊임없이 이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고 태도이다.

키취는 이미 내포적으로‘나쁨, 거짓, 조야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좋은 작품과 나쁜 예술 작품이 구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기준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는 많은 미학적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고급예술은 지배계급에게 점유됐고 동시에 지배의 도구로 이용됐다는 것을 생각할때, 키취는 새 시대를 빌미로 한 약속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키취가 대량 소비를 통해 문화의 민주화라는 아름다운 환상을 쟁취한 것처럼 보여도 키취의 논리는 삶과 인간 존재 자체를 키취라는 허위의 극면으로 이끌어간다.

끊임없는 소비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소유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네오-키취시대가 역속한 것처럼 우리는 편안하며 자기긍정에 차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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