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정보디자인·96년졸) 구글 수석디자이너
김은주(정보디자인·96년졸) 구글 수석디자이너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 저자. 정보디자인과를 1996년 졸업하고 디지틀조선일보와 CJ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미국 일리노이공대 디자인스쿨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시카고 모토로라, 샌디에고 퀄컴 등 미국 글로벌 기업에서 UX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삼성전자 원형 스마트워치 개발을 주도했다. 2018년부터 미국 실리콘 밸리의 구글 본사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스무 살의 나는 무서웠다. 집안을 발칵 뒤집고 선택한 디자인 전공이었다. 그런데 나의 미천한 디자인 감각과 실력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공 과제를 하기 위해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만 완성품이 마음에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의지대로 밀어붙였던 내 인생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날 기초디자인 수업에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서 내는 과제를 받았다. 내가 선택한 책은 (제목은 정확히 생각이 안 나지만) 미술관 접근이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동차량을 전시관처럼 만들어서 지역 동네를 찾아다니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기분이 상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을 어려서부터 보며 자랐다. 힘든 육체노동의 피로를 고작 소주 한 잔으로 달래야 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없어서 병원을 못 가고 고작 약국에서 연고 하나 사서 바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림이 줄 수 있는 위로가 무엇이란 말인가.

굳이 찾아가 영혼의 위로 어쩌고 하는 그들의 선민적 생각에 빈정이 제대로 상한 나는 적개심이 그대로 들어간 리포트를 써서 냈다. 그런데 그 리포트는 A+를 받았다. 내 생각을 드러내는 데 익숙지 않았던 나에게 큰 터닝포인트가 됐던 일이다. 뾰족한 생각을 뾰족하게 드러내어도 된다니….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나는 꽤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동네 치킨집 주인이 치킨집 로고를 만들어 주면 돈을 주겠다고 해서 디자인을 해줬다가 돈을 못 받은 적도 있고, 친구를 따라 보육원 자원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3학년 여름방학, 컴퓨터그래픽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선배의 제안을 거절 못 하고 덜컥 수락하고 나서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수강생 중엔 대학생, 취준생, 직장인들이 있었는데, 여름방학 2달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꽤 큰돈을 벌었다. 아마도 어림잡아 한 학기 등록금 정도는 벌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는 그 돈을 죄다 친구들과 술 마시는 데 탕진했다. 지독했던 짝사랑에 술은 좋은 약이고 위로였다.

1학년 때 친구들은 나를 과대표로 추천을 했다. 대체 뭘 보고? 그냥 시키면 할 것처럼 보여서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3학년이 되니 친구들은 다시 나를 전공과의 전 학년을 대표하는 과 학생회장으로 추천했다. 나는 수백 명 학생을 대표해 교수님과 선후배 학생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가장 큰 이벤트는 총 MT였다. 전 학년이 참여하는 총 MT를 위해 장소를 섭외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프로그램을 짜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었다. 전날 미리 답사를 하러 가고, 무거운 앰프를 옮기고, 사고 없이 행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가 행사가 끝나고 학생회 간부들을 집까지 바래다준 후 기절 아닌 기절을 했었다.

이 일을 겪고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온전히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통념이던) 여자라서 안 된다는 이유로 대신 리더가 되어줄 누군가도 없고, 무거운 것을 들어주는 누군가도 없고, (여자처럼) 다소곳하게 보일 누군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화에서는 내가 주인이고, 내가 일꾼이며, 그 누구도 “여자라서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뭔가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충격이었다.

사실 나는 큰 행사를 치르면서 불만이 쌓여있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답사를 하러 가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거운 앰프를 나르면서 ‘이런 걸 왜 (여자인) 내가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일꾼이 되는 것을,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스스로 가둬 두고 있었단 걸 깨닫는 순간, 나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내가 순응해버린 외부의 규범들, 즉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부모 때문, 사회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자리를 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화는 내게 그걸 깨닫게 해주는 기회였다.

나의 스무 살 이화는 뜨거웠다. 화가 나 있었고 반항심도 있었으나 표출하는 법을 몰랐다. 뜨거운 사랑도 했다. 진탕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 오장육부 쏟아내는 일도 했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고작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어리바리했고 실수도 잦았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이화를 선택할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혹은 점수에 맞춰서 하는 선택이 아닌, 이화가 내게 준 기회를 누리기 위해 나는 기꺼이 이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뜨겁게 살아낼 것이다. 나는 똑같은 좌절을 하고 같은 멍청한 실수를 하고 밤새 술 먹고 떠들며 인생을 괴로워하고 또 인생을 즐거워할 것이다. 스무 살의 이화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알기에, 이화에서의 안전한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단단한 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다시 이화를 선택할 것이다.

이제 막 이화에서의 삶을 시작한 스무 살 벗님들과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며 스물 어느 순간을 사는 벗님들께, 나의 스무 살 고백이 응원과 위로가 되기를…. 당신이 살아낸 오늘이 당신의 미래를 지켜줄 것이다.

김은주 구글 UX 수석 디자이너

 

키워드

#이화:연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