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식사는 단순히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 입의 즐거움 그 이상이다. 내게 식사는 내 정체성과 가치관의 일부이다. 1989년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작품을 통해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라고 말했다. 나는 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여성으로서 나의 몸과 신체가 지니는 정치성에 대해서 인식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비건으로서 나의 몸이 지니는 정치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나는 햇수로 대략 4년가량 비거니즘을 지향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려지는, 아니 사실 지금도 머뭇거려지는 ‘저 채식해요’라는 말. 나의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이면서도 특별히 밝혀야 할 상황이 없다면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먹을 것을 함께 나누면서 친해지는 것이 흔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내 밝히게 된다. 함께 저녁 메뉴를 말하며 저희 같이 이거 먹으러 가요! 라는 말에 저는 채식해서요라는 말을 흐리게 얹었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 끼얹어졌을 때 따라오는 당황과 이를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기려는 마음이 섞인 어색한 분위기.

채식을 선택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나는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동물권에 대해 생각하고,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채식을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한 끼는 위의 모든 것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동물권과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은 내가 이전에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동물권과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기반이 될 것이다. 내 하루 삼시 세끼에는 별거 아니더라도, 내 삶의 시간이 담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에서는 의도하거나 거창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채식하라는 권유도 아니고, 함께 먹는 사람들이 채식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채식하는 것을 보면서 채식인들이 가시화되고, 채식에 대해서 한 번쯤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게 여겨진다.

내 하나의 식사에는 내 삶 전체가 담긴다. 내 일용할 양식을 결정하는 데에는 많은 것들이 고민된다.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식품의 원재료 표시를 확인하는 것과 이제는 익숙해진 비건하면 무엇을 먹느냐는 질문들을 지나 결국은 나의 소수성에 관한 생각에 도달한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몸과 삶은 나와 나를 포함한 많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나 자신에게 추가로 얹어진 소수성의 무게를 담은 식사는 결국 이 무게만큼 더 안온한 식사를 소망하게 된다. 나를 포함한 소수성을 지니는 수많은 사람의 일용할 양식과 삶이 안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 말미의 소수성과 관련된 언급은 친구의 ‘비닐봉지, 빨대, 일회용 컵, 새 옷을 포기하기는 쉬웠지만 채식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나 자신에게 또 다른 소수성을 얹고 싶지 않은 걸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생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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