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은데 말할 자리가 없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공간을 허락받지 못한 시위대가 마이크를 놓고, 갈 곳 잃은 전단지가 비 맞고 울듯이 말이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이번 학기 학보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말할 공간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보에는 정기적으로 부장이 글을 쓰는 ‘상록탑’이 있어, 이번 학기에는 2번 글 쓸 기회가 있었다. 본교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직원들까지 읽는 대학신문에 대표로 글을 낸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다. 특히 사진기자로서 학보에 내 ‘글’을 싣는 일은 드물고, 취재 내용이 아닌 내 생각, 말을 공유하는 것은 더 드물어 참 신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자기 역할이 떡하니 있는 온점들을 연달아 찍어 줄임표로 만들고, 백스페이스로 텅 빈 공간만 늘려댔다.
주섬주섬 메모장을 펼쳐 글감을 찾는데 아이디어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벼운 주제만이 아니라, 몸담은 사회에 대해 하고픈 말도 있었다. 기사 댓글 창이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는 공론장 대신, 헛소리쟁이들로 가득 찬 시장통이라 화내기도 했다. 별의별 창조 논란을 만드는 가십성 기사들도, 했던 말 또 해서 돈 벌려는 이들도,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으로 어그로를 끄는 작자들도 답답했다. 질 떨어지는 표현을 그대로 베낀 글들은 역겨웠다. 또 거기에 동조하는 이들은 뭐람. 할 말이 이렇게 많은데도 글쓰기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내가 입막음을 자처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닫고, 몇 번이고 읽은 교과서와 눈 맞추던 그 습관이 글쓰기에서도 나오는 건 아닐까. 부족한 자신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말을 관둔 것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글쓰기에 부족해졌다.
입을 닫은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욕구는 있었지만,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늘 동반됐다. 말을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 내 말이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을까, 누군가 글을 보고 나를 비난하면 어쩌지. 타인의 말을 과신하면서도, 자신의 말은 불신하는 태도가 기저에 있었다. 익명이 아니라 이름 석 자가 붙기에 해야 하는 말도 가리고, 혹시나 먹칠이 될까 심한 말은 지우고, 먼 미래에 내 글을 보고 누군가 선입견을 품을까 숨기고. 그러다 보니 내 언어를 잃어버렸다. 내 말이 사회의 경종이 되기보다는 소음으로 취급될 것 같아서 입을 닫는 것이 편해졌다.
이는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 학보 밖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주인인 블로그에도 하고 싶었던 말을 쓰지 못한 채 숨기고 사는 사람들. 대외활동 중에 누가 들어도 불편한 말을 듣고도 무난히 그 그룹에서 활동하기 위해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냥 말한다고 해서 충족되지 않는다. 말을 듣는 사람이 있고, 충분한 효과가 있어야 한다. 말을 하기 전과 후가 같으면 내뱉을 이유가 뭔가. 이런 욕구가 지속해서 불충족 상태에 놓이면, 그냥 그 욕구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설명했던가. 안타깝게도 무기력함은 사회 전반에 널려있고, 대부분은 부딪히는 대신 자신의 발언권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삶의 전반은 자신의 언어를 찾아 갈고 닦는 과정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언제고 말할 수 있다. 또 말이 유일한 표현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글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어떤 이는 그림과 사진으로, 어떤 이는 자신의 악기로, 또 노래로, 춤으로 세상을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생겼을 때 어떤 곳에서라도 말할 수 있다는 당당한 태도는 무기력을 깨고 문제를 움츠러들게 만들 수 있다. 꼭 댕댕 울려야 경종인가, 꽹과리처럼 쨍쨍하고 울려도, 북처럼 둥둥거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만이다. 나는 말 잃은 이들이 시끄러워질 사회를 기다린다. 그 속에서 화음이 만들어질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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