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수필집에서 행복을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요즘 사람들이 흔히들 추구하는 ‘소확행’에 대한 정의라고도 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의를 통해 생각해보자면 소확행은 일상 속에서 아무 자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포착해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거창한 행복이 아닌 소확행을 추구할까.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거창하고 대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 하다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목표로 정한 행복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며 피로한 와중에도 행복을 결국에는 쟁취했다고 다독이는 스스로를 보며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다른 이유는 일과에 치여 살 때, 행복만큼은 머리 아프게 생각하거나 많은 시간과 힘을 쏟으면서까지 얻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행복의 크기가 작을지라도 편하게 얻고 싶은 것이다. 동시에 소확행은 ‘확실한’ 행복이기도 하다. 큰 행복을 얻으려다 실패하면 그 좌절감은 갈망했던 행복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이 좌절에 대한 위험 부담이 없는 안전한 ‘소확행’을 추구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것은 거창한 행복은 부담스럽고 여유가 없는 나에게 보장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어찌 보면 ‘행복에 대한 보험’이라고 생각된다. 나만의 소확행 중 하나는 빵을 먹는 것이다.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달달하고 꾸덕한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이빨 자국을 남길 때, 피곤한 아침을 담백하지만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바질 치아바타를 먹으며 쫀득한 빵과 은은한 바질 향을 느낄 때, 그리고 잠깐의 휴식 시간에 오븐에 노릇하게 구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을 때. 이것들은 그저 빵을 먹는다는 하나의 행위이지만 나에게 소소하지만 작지 않은 행복으로 다가온다.

거리에서 길고양이를 만나는 것도 나의 소확행이다. 지루하고 삭막한 거리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은 일상의 활력이 된다. 경계심이 많고 재빠른 고양이들을 포착해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을 때 나는 엄청난 성취감과 행복함을 느낀다. 남들에겐 그저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지치고 힘들 때 다시 꺼내보는 것은 빵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지만 큰 행복으로 나에게 작용한다.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보장된 행복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큰 안식처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나에게는 거창한 행복을 추구할 여유와 용기는 없지만, 나만의 소확행으로 내가 행복함을 느끼고 싶을 때 언제든 행복할 수 있기에 오히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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