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달고나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기억 속 달고나에 대한 기억은 ‘달콤함’이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항상 달고나 할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코 묻은 돈을 들고 여느 아이들처럼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곡선이 있는 동그라미, 삐죽빼죽한 별 모양은 실패하기 일쑤였기에, 나는 십자가 모양이 나오기만을 바랐었다. 무교였음에도, 십자가가 뽑힐 때면 구원을 받은 듯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뽑기에 성공하면 공짜로 주던 달고나 빵은 어떤 간식보다도 달콤했다. 친구들이 “한 입만”을 외칠 때면, 권력이라도 쥔 듯 어깨가 올라갔다.
얼마 전 대학로로 서울 나들이를 하러 갔다. ‘오징어 게임’ 열풍 때문인지, 몇 년간 안 보이던 달고나 점포가 보였다. 그중 하나는 실제 오징어 게임 달고나 제작에 참여하신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 어린아이처럼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줄이 길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과 주변 풍경은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달고나 점포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공사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중년들. 추레한 옷을 입고 추운 날씨에 연극 표를 팔고 있는 내 또래의 청년들. 서울 나들이를 왔다고 멋이 나게 옷을 차려입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만 원이든, 이만 원이든 쓸 것이라는 달고나 대열의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누군가는 자식의 달고나 게임을 위해 돈을 벌고, 어떤 청년은 또래들이 즐기는 달고나 게임을 즐길 여유조차도 없다는 사실은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너무 춥고 물가도 올랐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른 것을 하자며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 순간 달고나는 ‘씁쓸함’의 상징이 됐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달고나도 ‘씁쓸함‘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한 입만”을 외치는 친구들에게 나는 쉽사리 달고나 한 조각을 건네지 못했다. 겨우 5,000원인 내 용돈이 아깝다는 게 그 이유였다. 누군가는 뽑기 한 번을 할 수 있는 500원조차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한 편에는 나와 같은 달고나 군단의 친구 집단에도 끼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대학로의 인부들처럼 달고나 점포에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집으로, 센터로 돌아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현금 대신 계좌이체를 준비하는 모습뿐이다.
너무 커버린 나는 더는 달고나 게임을 ‘달콤한’ 추억으로 기억할 수 없다. 나에게 달콤했던 추억이, 즐거운 게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씁쓸했던’ 추억이며 ‘씁쓸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대열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들었던 말은 내 생각을 확신으로 바꿨다. “저렇게 연극 표 팔아서 막상 가면 관객이 앞줄에 4명밖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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