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진 전 여성가족부 차관(신방·86년졸)
이숙진 전 여성가족부 차관(신방·86년졸)

본교 신문방송학과를 1986년 졸업하고 여성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정책연구 및 교육분야에서 활동,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과 비서관으로 근무했고, 젠더사회연구소장과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 한국여성재단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여성, 복지, 노동 영역의 정책개발을 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일해 왔다. 2017년 6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여성가족부 차관을 지낸 뒤 2020년 8월 설립된 스포츠윤리센터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근 30여 년간 이어진 책읽기 편식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에 기대었을지도 모른다. 성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기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관심은 여기에 있었다. 미투, 디지털 성범죄, 여성 혐오 등의 이슈가 집중되었던 2018년, 정책 현장에 있었던 나의 책읽기 편식은 정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코로나19로 잠시 멈춰버린 듯한 세상에서 내 책장은 조금씩 변해갔다. 근 1~2년 사이 나의 책읽기 변천사는 어떠했나. 그리고 이글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질문을 할 예정이다. 혹여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있는가.

행정 집행부서에서 맞이한 미투 운동과 디지털 성범죄는 정책 차원의 대응책을 찾기에 바빴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미투 사건은 물론이고 “나 어렸을 적엔 다반사였어. 뭔지 모르게 기분 나빴지만 꾹 참았던 일”이라는 80대 할머니의 ‘라떼’ 미투까지 『미투의 정치학』은 장구한 성희롱·성폭력의 역사를 해석해주었다. ‘불법촬영 OUT’을 외쳤던 혜화역 집회에서 여성 대중들은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를 외쳤고, 동시에 페미니즘이 안내하는 다양한 출구 혹은 다른 출구를 알려주었다. 뒤돌아갈 수 없는 세상, 시대는 변했다.

 

'미투의 정치학'부터 '진화한 마음'까지

30여년 이어진 책읽기 편식과 변천사

오늘도 난 인생 '최애' 책을 기다린다 

세상은 어떻게 변한 것일까. 안다는 것은 지식의 업그레이드이며, 때로는 데이터를 통해 명확해질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팩트풀니스』는 인간과 침팬지가 서로 13개의 문제를 풀면서 팩트를 체크한다(침팬지 승리!). 지난 20년간 세계 극빈층 비율은 (2배로 늘지 않고)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 세계 30대 남성이 평균 10년간 학교에 다니는데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몇 년일지 생각해보시길)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통계의 왜곡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써 데이터를 무시한 시절이 있었으나 가끔은 숫자가 가장 유용한 설득 수단임을 현장에서 깨닫곤 했다. 그래, 데이터를 좀 믿어보자.

우리는 무한히 축적된 데이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데이터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데이터와의 대결이기도 했다. 인공지능 제작자가 인간이기에 결국엔 인간 승리일 것으로 믿었던 것은 단순함의 소치인가? 『인공지능과 인간』은 AI는 뇌를 모방하고 학습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과정의 결과이므로 이 둘은 결코 같을 수 없으며 특히 그 핵심은 진화임을 알려준다. 그래도 의문은 생긴다. AI도 진화한다면?

AI와 인간의 차이가 진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지금의 우리는 진화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걸까. 생존과 불사(不死)를 향한 인간의 인지 혁명으로 7만 년 전 유인원에서 사피엔스가 되었듯이,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우리는 새로운 종인 『호모데우스』로 살고 있거나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이미 데이터 흐름과 데이터 처리에 내재화되어 있어서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는 모토로 살아가는 데이터교의 신자가 됐다. 핸드폰 없이 살 수 없고, SNS에 끊임없이 사생활을 실어 나르며, 맞춤형 상품이 컴퓨터와 핸드폰에 전달되는 걸 보면 ‘데이터’는 이미 인간을 조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내가 주문한 책 목록 데이터는 내가 이런 류의 글을 쓰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인본주의가 신을 밀어내고, 데이터가 인본주의를 밀어내는 세상, 21세기 이후의 삶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싶다.

나는 생물학과 진화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무관심했다. 성차별은 성별 차이(gender difference)를 차별(discrimination)로 만드는 사회와 문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제 그 오래된 질문을 조금 다르게 던져본다. 차이는 왜, 언제부터 생겼으며, 오랜 세월 그 ‘차이’는 어떻게 변화(혹은 진화)됐는가, 그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 존중되어야 하는가. 책장 한편에 『빈 서판』, 『진화한 마음』을 놓고 틈틈이 읽는 이유다. 인류가 진화한 기간을 1년으로 압축해본다면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는 12월 31일 밤 11시40분쯤이란다. 성차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시기는 1년 중 마지막 날 하루 끝에 머물고 있는 정도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내 책장은 여전히 편식의 길을 걸을 것 같다. 차별하지 말자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서명하면서도 나 자신이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불확실성을 체득하고 있는 코로나 세대의 고용불안과 기후위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오늘도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의 신비로움에 빠져든다. 언제 어디서나 이 예쁜 책을 중간 페이지부터 읽고 앞 페이지부터 다시 또 읽는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지만 인생 ‘최애’의 책 한 권임을 고백한다.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4권의 책을 주문하며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인생 최애의 책을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그런 책 서너 권쯤은 있겠지 하면서.

※이 글에 등장하는 책 제목, 저자, 출판사를 소개한다. 『미투의 정치학』(정희진 엮음, 교양인),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권김현영, 휴머니스트), 『팩트풀니스』(한스 로슬링 외, 김영사), 『인공지능과 인간』(마쓰오 유타카, 진인진), 『호모데우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빈 서판』(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진화한 마음』(전중환, 휴머니스트),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박서영(무루), 어크로스)

이숙진 전 여성가족부 차관

키워드

#읽어야산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