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현 (국문·09년졸) 위든+케네디 도쿄
안소현 (국문·09년졸) 위든+케네디 도쿄

12년차 카피라이터. 광고회사 오리콤, 제일기획을 거쳐 위든+케네디 도쿄 재직 중. 배우 유해진이 출연한 삼성카드 광고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현재는 나이키, HP OMEN, 넷플릭스 등을 담당하고 있다.

 

씬 넘버 34. 천재 카피라이터가 옷까지 입은 채 욕조에 앉아 광고 아이디어를 고민 중이다. 그러다 문득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벌떡 일어나 회사로 전력 질주한다. 회사 임원과 광고주 모두에게 기립박수를 받는다. 난항을 겪던 신규 광고 캠페인 준비는 그 아이디어 하나로 물꼬가 트인다.

씬 넘버 21. 또 다른 신입 카피라이터. 가뜩이나 피곤하고 졸린 퇴근길. 버스에 앉아 기가 막힌 광고 카피 한 줄을 떠올린다. 김 서린 버스 창에 그 광고 카피를 낙서처럼 적어본다. 그리고 그 한 줄은 다음날 회사 팀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버스 뒷좌석에서 문득 떠올린 그 한 줄로.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광고 카피라이터에겐 어쩜 그리 아이디어들이 별안간 잘 들이닥치는지 만날 수만 있다면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혹시 무슨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10년이 넘게 이 일을 해온 나는 정작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아 다 쓴 치약을 쥐어짜듯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는데 말이다. 나에게 들이닥치는 거라곤 아이디어가 아니라 허기와 졸음뿐인데 말이다.

 

신선한 아이디어 짜내기 어려워

머리에도 몸처럼 근육 단련해야

괴로움, 마음의 웨이트 트레이닝

내가 하는 일은 광고를 만드는 일. 세상은 넓고 광고는 넘쳐나지만, 정작 광고를 보고 싶어 하는 이는 한 명도 없는 관계로, 광고는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 그 무슨 짓이 무슨 짓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어떤 곳에 광고해야, 어떤 내용을 광고해야, 하다못해 어떤 모델을 써서 광고해야 사람들이 그래도 눈길 한 번은 줄까. 짝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애타게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고 그 관심을 얻을 수 있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밤낮으로 갈구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라는 거,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10년 넘게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깨달은 것은 아이디어는 그렇게 스파크처럼 번쩍하고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뒤통수를 노리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마감과 쪽팔리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자뻑’과 ‘자학’을 오가는 와중에 ‘뭐라도 되겠지’ 모든 걸 다 놔버리고 싶은 그 순간. 그 모든 고비를 넘기며 쥐어짜고 긁어모아야만 나오는 게 아이디어다. 게다가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가 드라마처럼 세상을 뒤흔드는 일도, 회사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는 일도 없다. 그뿐인가.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보고하고 수정하고 다시 보고하고 수정하고 촬영하고 수정하기를 끝없이 반복해야 할 때도 많다. 심지어 그러다 그냥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영영 외장하드 안에 고이 잠드는 아이디어도 많다.

혈기왕성하고 패기만만하던 신입 시절, 누구보다 반짝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기껏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건 어디서 많이 본 뻔하디뻔한 것들뿐이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역시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 재능이 없다면 일찌감치 이 길을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 한 선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근육을 단련한다고 생각하라고. 머리에도 몸처럼 근육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라고. 매일 웨이트 중량을 늘리며 근육을 괴롭히다 보면 어느새 단단하게 근육이 자리 잡는 것처럼 머리도 자극을 주고 힘들게 하다 보면 아이디어를 내는 근육이란 게 생겨난다고 했다. 그러니 충분히 괴롭히라고. 그리고 괴로울 때마다 근육이 생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라고.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헬스장에서 PT를 받은 적이 있었다. 5킬로도 들어 올리기 버거운 몸뚱이였건만, 다음날 근육통을 심하게 앓고 나면 그다음 주, 그다음 달에는 10킬로는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는 몸뚱이가 되어있었다. 아이디어를 내는 근육도 꼭 그와 같았던 것이다.

여전히 신입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버벅대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신입 시절만큼 좌절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내가 마감과 회의의 압박에 견뎌내며 조금씩 웨이트 중량을 높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다음번 프로젝트에는 그 근육으로 좀 더 괜찮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썩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신입 때보다는 조금은 능숙한, 조금은 뻔뻔한 얼굴로 회의실에 앉아 내 생각을, 내 아이디어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엉엉 울던 시절을 생각하면 제법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도 싫지만은 않다. 내 마음을 괴롭히던 일들이 사실은 내 마음을 조금씩 더 단단하게 해주었다고. 그렇게 단단하게 키운 내 마음의 근육 덕에 나이를 먹을수록 쉽게 마음을 다치거나 동요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퍽 근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지금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이가 있다면 조금씩 웨이트 중량을 늘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먼 훗날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이 세상을 견뎌내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안소현(국문·09년졸) 위든+케네디 도쿄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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