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교육을 받는 내게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커피는 막 끓기 전 90도가 가장 맛있고, 우유를 넣은 음료는 70도가 적당해. 다들 뜨겁게 해달라고 하는데 사실 이 온도일 때 가장 맛있는 거야.”

카페에 오는 많은 손님은 음료를 더 뜨겁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나는 사장님 말씀이 무색하게, 스팀 피처에 우유를 담고 차마 손을 댈 수도 없이 뜨거워질 때까지 데운다. 데운다는 말보다는 끓인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님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우유가 담긴 음료를 만족스럽게 받아 간다. 그러고 나서는 호호 불어 식혀 마신다.

뜨겁게 데워달라기에 그렇게 드렸더니 이젠 또 너무 뜨겁다며 얼음을 넣어 달라고 하는 손님을 마주한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꼭 목욕탕 같은 인생을 산다. 몸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갔다가 견디지 못하면 바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탕에 뛰어드는 것처럼, 극과 극 위에서 외줄을 타는 것 같이 살아간다. 미지근한 탕도 있으면 좋을 텐데, 꼭 ‘앗 뜨거워’와 ‘앗 차가워’만을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인식 속 미지근이란 열정도 의욕도 그저 그런 흐리멍덩한 상태다. 무언가를 하긴 하는데 딱히 뭘 하지는 않는 상태. 지나고 보면 크게 기억에 남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던 상태 말이다. 어쩌면 이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현타’를 가장 많이 느끼곤 한다. ‘더 열심히 살 걸’ 혹은 ‘이렇게 지낼 바에야 차라리 팽팽 놀아버릴 걸’ 하는 후회를 뱉으며 말이다.

나 역시 그런 미지근함을 극도로 꺼리던 사람 중 하나다. 재수생 시절 나는 늦잠을 자는 날이면 그날을 내다 버린 것처럼 생각했다. 어중간하게 공부해 어중간한 성취감을 얻을 바에는 하루를 공백으로 두는 게 마음 편했다. 반대로 일찍 일어나 독서실에 1등으로 출석한 날이면, 더 많이 더 열심히 공부를 하려는 욕심에 밤새도록 자리를 지켰다.

인생에 모 아니면 도의 갈림길만 있는 것처럼 살아가던 나는 대학에 와서도 여전했다. 공부로, 알바로, 대외 활동으로 시간을 쪼개 살아갈 때면 내가 마치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다 불붙은 열정이 타고 타서 더 이상 못 쓰게 됐을 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얼어붙은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몸을 태우다가 꺼뜨리고, 다시 태우다가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커피는 끓기 직전이 맛있다. 너무 뜨거운 커피는 오히려 맛을 느끼기 힘들다. 이미 끓어버린 우유는 맛이 맹물처럼 밋밋해진다. 우리도 똑같다. 너무 열렬하게 사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지 모른다. 매일 스스로를 불태우며 산다면 남는 것은 한 줌 재뿐일 것이다.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의 적당한 미지근함이 있어야 그게 무엇이든 간에 오래오래 해낼 수 있다.

미지근은 뜨거워도 보고 차가워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장의 증표 같은 거다. 데여도 보고, 얼어도 본 사람만이 진정한 미지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더 뜨겁고 싶다면 한발 나아가면 되고, 더 식히고 싶다면 그 상태 그대로 조금 더 있으면 된다. 미지근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미지근한 맛을 알아가는 나는 카페에 갈 때면 이렇게 주문하곤 한다.

“따뜻한 카페라떼 주시는데요, 뜨겁지 않게 해주세요!”

이 글을 읽는 소중한 이화인들도 뜨뜻미지근한 우유의 달큰한 맛을 느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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