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는 여름이 끝났다고 하지만, 한동안은 덥기 마련이다.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건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얼굴에 훅 끼치는 공기. 세상의 것들이 차가워져서 풍기는 냄새다. 그리고 그건 나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작년 가을에 놀이치료를 했었다. 내가 내담자였다. 누군가가 ‘다 커서 무슨 놀이치료를 받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 없다. 왜냐면 나는 진짜 ‘아동’ 놀이상담의 일환으로 받은 거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그럴듯한 사정이 있다.

5월에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었다. 우울한 여름을 보내고 문득 맞은 찬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이것저것 신청했다. 목회상담심리사 트랙이 그중 하나였다. 목회상담뿐만 아니라 놀이치료, 미술치료, 모래놀이치료 같은 아동놀이상담까지 포괄해서 배우는 과정이었다. 조교님이 우선 아동놀이상담 내담자 경험부터 시작하는 것을 권하셨고 바로 며칠 뒤에 나는 놀이치료 전문가 선생님과 연결됐다. 그렇게 얼떨결에 놀이치료를 받게 된 거다.

치료실의 문을 열자 장난감과 피규어가 가득한 책장이 보였다. 문을 등지고 앉은 선생님이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는 놀이치료를 전에 매번 근황을 나눴다. 장난감으로 가득 찬 방이 내 심리적 퇴행을 끌어냈는지, 사소한 것들까지 다 얘기하게 됐다. 밥 먹은 얘기, 늦잠 잤던 얘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면 선생님이 “그때 기분이 어땠어?”, “왜 그런 마음이 들었어?”하고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당황했다.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하하” 평소에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인 터라 금방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대화가 끝나면 바로 아동놀이상담을 진행했다. 놀이치료, 미술치료, 모래놀이치료를 모두 진행했는데, 이 중 모래놀이치료를 할 때 일이었다. 모래놀이치료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방안에 가지 각각의 모래가 담겨있는 직사각형 상자가 있다. 부드러운 모래, 젖은 모래, 거친 모래. 그중 내가 끌리는 모래를 고르면 된다. 그다음에 모래 위에 피규어들을 무작위로 배치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멀리서 내 행동을 지켜보다가 기록한다. 주제도, 시간제한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날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 위에 숲속 연못을 만들었다.

“이리 와서 한 번 봐봐.”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어때?” 나는 나무의 배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내가 보던 장면과 달랐다. 분명 연못 주위를 장식하려고 둔 나무였는데, 그 자리에서 보니까 방어막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동놀이상담에서, ‘놀잇감은 단어이고, 놀이는 그들의 언어’라는 말이 있다. 놀이에는 사람의 마음과 무의식이 표현된다. 내 모래는 비밀을 품고 있었고, 그걸 감추고 있었다. 모래를 짚으며 분석하던 선생님이 덧붙였다. “마음은 입체야.” 그래서 다른 각도로 보았을 때 달라.

마음은 종이처럼 납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어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던 거다. 또 어쩌면 마음은 3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일 수도 있다. 무한 확장되는 우주의 공간처럼. 물론, 마음은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다. 물리의 법칙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상상은 우주를 가슴에 품고 싶은 문과생의 망상일 뿐이란 걸 안다. 하지만 분명히 마음은 우주의 공간과 닮아있다.

첫째, 마음은 시간이라는 다차원의 중첩 축을 가진다. ‘변심’이나 ‘지속성’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음에는 시간 좌표가 있다. 시인 이시영이 그러지 않는가.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있지 아니하다’고. 이때 그의 마음은 과거에 좌표를 찍고 있다. 둘째, 마음에는 우주처럼 웜홀이나 블랙홀이 있어서, 과거나 미래로 데려다준다. 길 가다 붕어빵 냄새를 맡고, 어렸을 때 할머니가 사 온 붕어빵이 생각나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 경우 웜홀은 냄새다. 그런데 가끔 사물도 웜홀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마음이 입체라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오래된 MP3 기종을 소개하는 영상을 봤다. 5월에 세상을 떠난 그가 쓰던 물건이 등장했다. 그와 같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며 놀던 게 생각이 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비밀이 튀어나왔다. 그날 밤에 이불 속에서 그가 그립다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2014)에서 주인공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딸 머피와 재회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난 구멍으로 그와 다시 만난다. 다시 내년에 가을이 와서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 나는 작년의 일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억할 것이다. 내가 그를 생각할 때, 그 순간에 그는 살아있다. 다차원의 우주로 확장되는 내 마음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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