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작가
정다운 작가

여행 에세이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여행하는 것만큼 좋은 것 같다. 처음부터 여행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종종 국내로 가족 여행을 다녔지만 그렇게 즐거운 기억은 많지 않았다. 어딜 가든 차는 막혔고, 그러다 보면 다들 예민해졌다. 분위기는 자주 싸늘해지곤 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했다. 그땐 여행은 곧 고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너무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고, 남들 다 가는 여행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아서 떠난 여행이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한인 민박집 이층 침대에서 잠을 자고, 아침 식사는 숙소에서 해결했다. 점심과 저녁은 보통 맥도날드 치즈 버거나 거리에서 파는 피자 한 조각으로 때웠다. 감자칩 한 봉지를 식사 대신 먹기도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꼭 가고 싶은 곳만 골라서 입장했다. 쇼핑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 대신 많이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어디 가지?”만 생각할 수 있다니! 다른 고민은 접어두어도 된다니! 여행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불편한 침대에서 자고, 편하게 씻기 위해 아직 어두울 때 더듬더듬 일어나면서도 좋았다. 가고 싶은 벼룩시장까지 오래 눈길을 걷느라 발가락이 꽁꽁 얼어도 즐거웠다. 야간열차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도, 내일 눈을 뜨는 곳이 새로운 도시라는 사실이 기뻤다. 그때 알았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은 내가 선택한 고생이었다.

 

직장 관두고 6개월 남미로 

시작은 늘 책읽기부터

그것마저 이미 여행이었다

졸업 후 취업을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매월 5만 원씩 인터넷서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북포인트’를 줬고 나는 포인트 대부분을 여행과 관련된 책을 사는 데 썼다. 가고 싶은 곳의 여행기, 생활기, 역사책,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그 고장 출신의 작가가 쓴 책까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한 장소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면 걷고 싶은 거리, 공원이나 가보고 싶은 서점, 카페, 식당이 생긴다. 그렇게 그곳이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면 여행을 떠났다. 천천히 걸으며 책으로만 읽던 곳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런 여행이 좋았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일 년에 세 번이나 해외로 여행을 간 적도 있다. 회사 일이 가장 바쁠 시기였다. 그때 다시 한번 알았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루의 모든 걸 내 의지로 선택 할 수 있기 때문이구나. 고생까지도.

회사 생활이 고단해 그만두고 싶어질 때면, 퇴사 후 장기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기왕이면 멀리, 가장 멀리, 그래 남미가 좋겠다. 그때부터 남미 여행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몇 년을 사고 읽고 또 사고 읽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남미 여행기는 모조리 읽은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은 오소희 작가의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과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두 권이다. 오소희 작가는 내 기준 가장 이상적인 여행을 하는 작가로, 두 권의 책을 통해 남미에서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다음 읽기 시작한 책들은 남미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책들. ‘시몬 볼리바르’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그리고 남미의 대표적인 인물인 네루다, 체게바라 등등에 대한 책을 샀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얕은 지식이나마 남미의 역사를 더듬더듬 이야기하게 되었고, 낯설기만 했던 도시의 위치가 익숙해졌다. 자, 이제 남미로 여행을 떠나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사표를 냈다.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인들이 책을 선물했다.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각각 다른 사람이 준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여행 전에 읽어야 하는 책은 여행기도 역사책도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건 실용 서적보다 고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치부하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가이드북을 많이 본 사람이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고 역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조금 더 많이 보고 올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 여행이란 그 사람의 그릇만큼 하고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그릇을 키우는 건 고전이고, 인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떠나야 하는데, 그릇을 키울 시간이 없는데, 나는 이 여행을 위해 회사까지 그만뒀는데, 이 작은 그릇으로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올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소희 작가의 책 두 권과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 장 그르니에의 ‘섬’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나는 작은 그릇으로 6개월간 남미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릇은 키우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그 길 위에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그릇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릇의 크기와 상관없이 애초에 제대로 된 여행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와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남미 여행기로 첫 책을 내고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나는, 여전히 남의 여행기 읽는 걸 좋아한다.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해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여행을 꿈꾸면서 이미 시작된다. 그 도시에 대한 책을 사서 읽고, 여행에서 돌아와 찍은 사진을 펼쳐보는 일까지 모두 여행이다. 나의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다시 여행 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시작된 여행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다음 단계는 여행과 관련된 책을 읽는 일이다. 모쪼록 좋은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

정다운 작가

∥본교 심리학과 2004년 졸업. ㈜네이버에서 기획자로 일하다 반년간의 남미 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에세이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를 출간했다. 제주에 이주해 제주도민 인터뷰집 ‘제주에서 뭐 하고 살지?’를 썼고, 2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살았던 경험을 담은 ‘바르셀로나, 지금이 좋아’를 펴냈다. 현재 제주에서 지내며 ‘배려의 식탁, 제주’(공저) 등 집필과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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