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정경은씨
제공=정경은씨

산책을 갔다가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오는 길에 전에는 보지 못한 표지판을 보았다. 아파트 단지를 나가는 길에 “아빠!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 길을 지나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선 이 길로 다니지 않은 지 꽤 됐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이 표지판에는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만 적혀있었다. 처음 그 표지판을 봤을 땐 이상한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지금처럼 맞벌이 가정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을 하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꽤 많았다. 우리 엄마도 나와 동생을 낳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셔서 결국 일을 그만두셨다.

며칠 뒤에 저 표지판을 두 번째로 봤을 땐 조금 이상했다. 요즘은 아빠만 출근하는 게 아닌데, 왜 ‘아빠’라고만 적혀있을까? 세 번째 그 표지판을 보았을 땐 조금 불편했다.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주부’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느낌이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 저런 클리셰가 존재할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21세기에도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쓰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도 육아휴직을 할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양육이 여자 혼자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여성에게도 출산 후에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됐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덕분에 맞벌이 가정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상황인데, 저 표지판은 왜 시대에 뒤처져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는 그 길을 지나갈 일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연히 길을 걷다가 그 표지판을 다시 보았을 땐 조금 이상하고 불편했던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가 아닌, “아빠!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로 말이다. 그저 ‘아빠!’라고 적혀있는 칸에 ‘엄마!’라는 두 글자만 추가한 것일 뿐인데,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누군가 이 표지판을 보고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나는 미처 하지 못한 용기를 낸 것이 아닐까? 순간 불편한 감정만 느끼고 그것을 한 단계 더 나아가 태도로 변화시키지 못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때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예민하다고 욕을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예민함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그것이 차별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모차’를 ‘유아차’로, ‘저출생’을 ‘저출산’으로 바꾸려는 노력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몇십 년을 이렇게 불렀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익숙함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알고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표지판도 누구나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묻혔을 수도 있다. 아빠만 회사에 출근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편함을 바꿀 수 있는 용기에 오늘도 세상은 바뀌었다.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이러한 변화가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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