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는 ‘인류가 지배하는 지질 시대’를 뜻한다. 인류세에서 지구 시스템의 변화는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일어난다. 지질 시대의 구분 기준이 지각 변동이나 생물의 멸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인간은 안정적으로 지속되던 홀로세를 끝내고 지구 환경에 불안정을 가져온 ‘교란자’에 가깝다. 

인류세 개념은 현재 수용 자체도 활발한 논쟁거리다. 하지만 이 용어의 수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구가 환경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인류세의 국면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다. 학자마다 그리고 학계마다 다양한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라는 뻔한 결론을 내렸다. 수없이 들어서 체화된 듯한 이 말은 그토록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 쉽게 실현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환경 보호에 지나친 열정을 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3년 정도 지나 열정은 힘을 잃게 되었는데, 그때 얻은 교훈이란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시스템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인간 중심주의 탈피’는 쉽사리 인류의 사고방식을 바꿀 기회를 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인류가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인류세에, ‘인간 중심주의 탈피’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익숙한 껍데기가 지닌 피상성을 벗고, 본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몸’의 관념적 정의를 넓히는 것이 그 일환일지도 모른다. 몸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이루는 전체. 또는 그것의 활동 기능 혹은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이 지니는 3차원적 덩어리는 모두 몸이라고 부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신체의 정의에 있는데, 신체는 ‘사람의 몸’이다. 머릿속으로 이 두 개념을 두고, 상위관계를 따진다면 몸은 신체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다. 그런데 어쩐지 '몸은 곧 신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인류세의 몸은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 의미가 신체화되었다. 몸의 정의에서 자꾸만 다른 존재들은 배제되고, 인간의 몸만이 그것을 독점해온 결과가 인류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기준으로 시장성 있는 개체들은 비대하게 양산되고, 여기에 방해가 되는 개체는 죽임을 당한다. ‘쓸모없는’ 동물의 터전은 곧 ‘쓸모있는’ 동물 생산을 위해 파괴된다. 이미 자연은 오랫동안 인간의 몸만을 위해 개발되고, 사용되어왔다. 동물의 덩어리가 만약 인간처럼 삶을 영위하는 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터전이 이렇게 허무하게 위기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류는 그들의 덩어리가 '몸'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알지만 이에 무뎌진 것은 아닌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지구의 균형은 결국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몸의 주체가 될 때, 그리고 그 몸들이 살아나갈 공간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될 때, 비로소 건강하게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집단의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누가 바뀌어야 할까.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