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영 통역번역대학원 교수(정영목 번역가)
정호영 통역번역대학원 교수(정영목 번역가)

아마 이 칼럼이 눈에 띌 때마다 많은 사람이 “읽어야 산다”는 비장한 제목에 잠시 칼이 살에 닿은 듯 흠칫 놀라며, 혹시나 자신이 가사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곤 할 것이다. 이 말이 비장한 것은 이때의 “산다”가 “뭐 하고 사니?” 할 때의 ‘살다’가 아니라, “아니면 죽는다”가 괄호에 담긴 ‘살다’이기 때문이다(“읽으며 산다”와 비교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비장한 계몽을 떠올리며, 대학 신문에서 이렇게 죽고 사는 문제로 읽기를 강조하는 데서 거꾸로 어떤 위기를 감지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읽기가 꼭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과 사는 것을 그렇게 분리된 두 항으로 설정하는 것에 오히려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들, 마치 읽기를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처럼 “읽어야”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읽는 게 사는 거고 사는 게 곧 읽는 것이어서 둘이 구별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흔히 이런 사람을 훌륭하게 보지만, 글쎄, 이걸 우열의 틀에 넣고 보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늘 읽으며 사는 삶, 심지어 삶마저 읽으며 사는 삶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뭐 그건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한 종류의 삶이려니 여길 수도 있을 듯하다.

 

때론 해석적으로, 대개는 즐겁게

나에게 맞는 읽기 강도를 찾자

다만 그런 삶이 수동적이고 잠잠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인 데가 있다는 점(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지라도)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읽어서 어떤 인식에 이르는 데는 직접적으로 접수되는 감각적 인식보다 능동적인 노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다”나 “듣다”라는 말에는 피동형인 “보이다”나 “들리다”라는 수동적 상태가 어울리는 경우가 많지만, “읽다”의 피동형인 “읽히다”는 매우 좁게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읽기가 수동적인 상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아예 그 말을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술 마실 곳을 찾다가 술집 간판을 “보고” 술집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간판을 “읽고” 술집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예로부터 글을 읽는다는 말은 치열한 공부를 뜻했다. 영어에서도 대학 전공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곤 했다(가령 read English). 읽기는 인간의 문명 건설과 관련된 지극히 인위적인 활동인 셈이며, 또 물론 그런 인위적인 활동으로서 장단점을 다 갖고 있다.

읽기에 왜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할까? 그것은 인간의 소통 수단인 언어가 매우 성긴 그물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건져내지 못하는 부분은 상상으로 포착해야 하며 이런 노력을 우리는 “읽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빨간 사과를 맛있게 먹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 사이에 이 정도의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어떻게 얼마나 빨간지, 맛있다는 게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친구의 경험 그대로 알 수는 없다. “새콤달콤했어”라고 말하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언어로 그 경험 자체를 전달받을 수는 없다. 인간의 소통에는 이런 근본적 단절 또한 내재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그 친구의 말에서 정보를 충분히 전달받았다고 느끼며 이걸로 충분히 읽기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맞다. 실제로 그 정도로 충분한 경우가 많고, 현재 문명 수준에서는 그런 식으로 평생 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절을 넘어서서 친구의 경험 자체로 들어가려 하면 문제는 복잡해지고 더 높은 강도의 읽기가 요구된다. 더 적극적으로 친구와 사과에 관한 여러 정보를 가져오고, 또 자신이 사과를 먹은 경험을 투사하고 다른 정보와 비교하기도 하면서 친구가 성긴 언어로 포착하려 했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심지어 친구의 의도를 넘어서서)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강도가 높아지면서 해석적 읽기가 생겨나고, 읽은 걸 내 언어로 정리해 보려 할 때 번역적 읽기가 생겨난다.

구태여 왜 그렇게까지? 앞서 말했듯이 그냥 그런 강도 높은 읽기가 즐거워 못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들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읽기가 필요한 영역이 존재하며 이런 영역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학은 그런 영역이 유난히 많이 모인 곳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도 높은 읽기가 대학의 중심이라고 비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만 모인 곳은 또 아니다.

따라서 자신과 체질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흔들릴 필요 없이 자신에게 또 자신의 영역에 맞는 읽기 강도를 찾으면 된다. 때로 비장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에게 맞게 즐겁게 읽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자기에게 필요한 강도에 맞추어 재미를 붙여 읽다 보면, 누가 아는가, 더 높은 강도를 찾아 나서고픈 마음이 불끈 솟아오를지? 그런 사람에게는 다행히도, 대학은 또 그런 강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호영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번역가(필명 정영목)로 활동하며 현재 본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주로 문학번역을 가르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책도둑’, ‘눈먼 자들의 도시’, ‘인간성 수업’, ‘축의 시대’, ‘혁명의 기술에 관하여’, ‘미국의 목가’ 등을 옮겼다.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 문화사’(공역)로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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