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위로가 되는 것들' 저자

 

배승민(의학·03년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배승민(의학·03년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운전 중 급하게 자료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 인터넷이 가능한 근방의 카페에 들어갔다. 부랴부랴 서류를 보내고 한숨을 돌리며 보니 카페 벽에 걸린 서프보드와 바다 풍경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자연을 가까이할 기회가 적어서였을까? 나는 한풀 식은 커피잔을 든 채로 한동안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병원이란 곳은 참 신기한 곳이다. 삶과 죽음, 극렬한 감정과 사건들이 뭉쳐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의사로 근 20년째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병원은 그냥 직장이다. 직장으로서의 병원은 항상 어딘가는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고, 매년 졸업하는 학생과 전공의, 동료 선후배들을 떠나보내고는 서운해할 틈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 밀려든 새로운 학생과 전공의, 이직해 온 동료 선후배를 만나는 변화의 장소이다. 20대에 이 변화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건만, 빳빳한 새 가운 차림만큼이나 긴장 가득한 표정의 앳된 의사들을 마주칠 때면, 문득 거대한 병원 건물 한가운데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듯했던 나의 출근 첫날이 생각난다.

 

파도처럼 쉼없이 변화가 몰아치는 현대사회
내게 맞는 파도가 올 때까지 마음근육 키우길

전공을 정하고 첫 출근을 할 때만 해도, 의사 가운 외에 여러 옷을 걸치고 일하는 지금의 내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소아정신과학을 전공하고 현재 병원과 학교에 적을 두었지만 동시에 책을 번역하고 틈틈이 글을 쓰면서, 아동성폭력과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센터들에서도 일하고 있다. 아침이면 아이의 오늘 일정을 체크하는 엄마였다가, 출근해서는 아침 회의를 시작으로 교수로서 일하고, 오전 진료실에서는 의사로 생활하다가 오후에는 자리를 옮겨 국가센터의 관리자로 일한다. 틈틈이 소속된 학회 회의를 하거나 입원환자를 살피고선 퇴근한 뒤에는 다시 정신 나간 엄마 모드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잠들기 직전에서야 깜빡 놓친 집안 대소사나 원고 마감이 떠올라 헐레벌떡 급한 불을 끄려고 낑낑대는 것이 일상이다.

내 상황이 좀 과할 순 있겠지만, 우리 현대인의 삶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변화가 무쌍하다. 비단 직장인만이 아니라 학생일 때에도 매해 선후배와의 관계와 상황이 바뀌고, 가족이나 친구와의 사이도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수면 아래에서 계속 바뀐다.

조상들은 과연 어땠을까? 물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바뀌는 인간관계와 약간의 위치 변화는 있었겠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같은 지역에서 살아왔던 사람들과 어울렸다. 부모가 대장장이라면 나도 쇠를 다루고, 내 자식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 것으로 생각했으며 대다수는 그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전에 없던 전기나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세상이 곧 망한다며 온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작은 변화에도 민감했으니 말이다. 그런 시대였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경험치가 됐고, 지역사회에서도 존경받아 마땅한 값진 자산이 되었다. 예정된 삶의 경험을 착실히 쌓기만 해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십여 년 전 아동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를 처음 맡았을 때, 나는 내가 그간 의사로서 쌓아온 모든 지식과 경험들이 휴지 조각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충우돌 끝에 간신히 정신을 조금 차릴 무렵, 갑자기 법무부 위탁의 강력범죄 피해자 심리지원센터인 스마일센터를 맡게 되어 불혹의 나이에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생초보자 신세가 됐다. 이런 당혹스러움을 나만 겪나 했더니, 주변인들도 이직하거나 투잡을 뛰느라, 또 누구는 아이를 다 키운 뒤 제2의 커리어를 쌓느라 역시 쉼 없는 위치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변화를 서핑하듯 스스로 조절하며 즐기느냐,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물을 먹어가며 허우적대고 있느냐만 다를 뿐.

이러한 쉴 틈 없는 변화는 현재의 삶만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미래마저 불안하게 만든다. 나보다 앞선 세대의 선배들은 ‘이 직업, 이 정도 경력의 이 정도 경제 수준이라면’이란 기준으로 대략 5년, 10년 뒤의 자기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무엇 하나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장기화한 팬데믹 상황에서 전문가들조차 말이 제각각이다. 답답함에 선배나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아도 딱히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 그들 역시 이러한 미래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중심조차 잡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요즘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건강한 몸만들기 열풍이나 서핑 바람이 참 반갑다. 어마어마한 운동 치인 내가 당장 서핑을 배우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서퍼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과 함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서핑 문화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매우 많다는 걸 느낀다. 서퍼들은 아무리 자신이 베테랑일지라도 자연의 힘을 쉬이 보고 이기려 들지 않는다. 좋은 파도를 만나려고 무리해서 욕심을 내기보다, 자연스럽게 그것이 다가왔을 때를 볼 줄 아는 눈과 경험을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드물게,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다가오는 좋은 파도와 날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날이 궂으나 몸이 피곤해도 중심 근육의 힘을 키우는 데 묵묵히 집중한다.

정신없는 변화의 시기, 삶이라는 저마다의 인생의 파도를 타야 하는 우리에게 몸의 근육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 근육을 키우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발목을 다친 뒤 좌절과 불안 속에서도 매일 반복했던 재활 운동이 나를 다시 걷게 해주었던 것처럼, 현재가 힘들고 미래가 불안할수록, 우리에게 맞는 바람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과 그 바람이 왔을 때 온전히 파도를 탈 수 있는 마음 근육의 힘을 키우는 우리이길 바란다. 내게 맞는 파도가 올 때까지, 지치지 않게 쉬엄쉬엄.

배승민(의학·03년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천스마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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