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언론·05년졸) KBS 라디오PD
이주영(언론·05년졸) KBS 라디오PD

지금 시각은 밤 10시 27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자기만의 독서’에 막 오늘 치 독서 인증을 마쳤다. ‘자기만의 독서’는 올해 초,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 넘쳐났던 나와 친구가 하루에 30페이지씩 읽어보자는 취지로 만든 랜선 독서클럽이다. 인증을 하지 못한 날에는 벌금이 붙고 매달 말일, 한 달 동안 모인 벌금으로 커피 쿠폰을 사서 독서클럽 멤버들과 나눠 가진다. 하루 30페이지면 껌이지, 라고 생각했던 나는 첫 달에 벌금 최대금액인 1만 원을 냈고 지금까지도 ‘만원 (벌금) 클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생 때처럼 책 읽기가 더 이상 숙제가 아님에도 왜 벌금까지 내 가면서 매일 책을 읽는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책 읽기, 특히 소설을 읽는 일이 슬프게도 내게 순수한 재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을 어렵게 손에 넣은 뒤 두근거리며 첫 장을 넘겨보는 일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 비극은 7년 전 소설 습작을 시작할 무렵 스멀스멀 시작되었으며 2017년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을 공부하면서 급격히 심화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단순히 재미만을 느끼며 소설을 읽는 시절은 내게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습작 시절을 지나면서 내 머릿속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하나 생겼는데, 그 기계는 내 눈이 문장을 읽어나가는 동안 소설의 구조와 캐릭터와 문장과 작법을 자동으로 분석한다. 2년 전 ‘요즘 소설 이야기’(문학서점 ‘고요서사’ 차경희 대표와 함께 문예지에 실린 단편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제작을 시작하면서 이 컨베이어 벨트는 더 빠르고 정교해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기계를 멈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아름답고 추악하며 따뜻하고 서늘한 세계, 문학

이상한 방식의 위로 받으려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결국 다시 내게 돌아오는 질문. 순수한 재미를 주지도 않고 의무 사항도 아닌데 왜 나는 문학을 놓지 못하는가. 밥벌이도 아니고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나는 왜 퇴근 후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다시 책상에 앉는가. 주말에 놀러 가자는 가족들에게 왜 늘 “안 돼, 나 소설 써야 해”라며 바쁜 척을 하는가(그렇다고 몇 줄 쓰지도 못하면서). 그 이유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추악하며 따뜻하고 서늘하며 이상하고 뒤틀린 세계가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고 뿌옇고 먼지투성이인 ‘문학이라는 창문’을 통해서만 인간과 삶에 대한 비밀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예술 장르도 이 같은 역할을 분명 수행할 것이다. 다만 내 삶에선 문학이, 정확히는 소설이 이 일을 해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허구, 거짓의 세계라는 점이다. 세상에 없는 인물과 배경과 사건을 만들어서 아주 그럴듯하게, 진짜인 것처럼 꾸며서 독자를 홀린다. 그런 허구의 이야기 속에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니, 소설은 그 태생 자체로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소설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분명하다. 나는, 우리는, 인간은 왜 이렇게 나약하고 비이성적이며 일부러 잘못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데다 때론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순간에도 죽지 않고 생을 붙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소설은 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답은커녕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다시 안겨줄 때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좋다. 세상과 삶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정답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확하고 절대적인 진리 대신 어렴풋한 실마리나 단서, 기척을 얻어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쁘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혹시 이런 건 아닐까, 라며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내게 말을 거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렵다.

팟캐스트 ‘요즘 소설 이야기’에서 가장 최근 방송한 작품은 임선우 단편소설 ‘유령의 마음으로’의 전문 낭독이다. 지난해 말 차경희 대표와 함께 이 소설을 소개한 뒤 작가의 목소리로 작품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최근 임선우 소설가의 낭독으로 ‘유령의 마음으로’의 전문을 녹음했다. 이 소설의 화자는 빵집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이다. 그런 ‘나’에겐 2년간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남자친구 정수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이 나타난다. 신묘한 재주라곤 하나도 없지만 내 감정을 정확하게 느낄 줄 아는 유령은 내가 꾹꾹 억누르고 있는 슬픔의 크기도, 정수에 대한 사랑이 끝났다는 마음도, 그걸 인식할 때마다 드는 죄책감도 정확히 안다. ‘나’를 대신해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린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유령이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유령이 화자를 끌어안았을 때엔 내가 그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했다. 가슴 한구석에 버려둔, 모른 척하고 싶은 감정을 유령에게 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럽고 또 시원했다. 세상에 유령 따윈 없고 설사 유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내 유령이 아니라 소설 속 화자의 유령인데도 그랬다.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이 이상한 방식의 위로는 오래 내 곁을 머물렀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함 때문에,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이주영(언론‧05년졸) KBS 라디오PD

∥KBS 1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프로듀서. 본교 언론정보학과를 2005년에 졸업했다. 연합뉴스 기자를 거쳐 2009년부터 KBS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 ‘슈퍼주니어의 키스 더 라디오’ ‘유지원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을 연출했다. 문예지에 실린 신작 소설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요즘 소설 이야기’를 제작,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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