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트리거가 있으신 독자분은 주의 바랍니다.)

2019년 10월 14일의 쌀쌀한 가을밤, 나는 도서관의 작은 소파들 중 하나에 앉아 곧 들이닥칠 시험들을 준비하며 계획표를 짜고 있었다. 대화해도 되는 도서관 구석이지만 지금 내 앞에서 통화하고 있는 여학생은 너무나 큰 소리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야! 설리가 죽었대. 사망했대. 구급차에서 데려가면서 쓴 자료가 유출됐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가 방금 뱉은 말이 너무나 믿을 수 없어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로 접속한다. 아, 그녀는 정말로 벌써 세상을 떠난 고인이었다. 마음의 한 구석이 마치 갈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조차도 내 슬픔에 놀라버렸다. 도대체 설리가 내게 있어 무슨 의미길래 나는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을까.

설리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나는 주변 여자들과 남자들에게 설리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지 하나둘씩 물어보았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허전하다’, ‘공허하다’, ‘마음이 텅 빈 것 같다’라는 우울한 대답을 내놓았다. 반면 남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고인을 향해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그 죽음을 여성들이 인터넷에 달았던 ‘악플’ 탓으로 돌렸다. 끝까지 설리의 죽음에 대하여 진담이든 거짓말이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괴로웠고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설리라는 존재를 페르소나 중 하나로 착취했던 것 같다. 전통적인 여성상에 맞서는 설리는 앞서나가는 페미니즘 리더로서의 페르소나, 사진작가 로타와의 작업은 그녀를 욕망하는 이들이 원하는 완벽하게 수동적인 여성의 페르소나,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규칙과 규율을 깨고 살아가는 모습은 이십대 초반 말괄량이의 페르소나 등,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솔직한 설리에게서 가져왔던 것 같다. 사실 이 모든 역할을 100% 완벽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는데도.

그래서인지 그녀를 향한 애정과 혐오는 바람 속 가지처럼 언제나 흔들렸다. 끊임없이 유리할 대로 방향을 틀어 설리를 공격하고 욕하고 악성 기사를 쓰는 사람들을 보고,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의 삶과 가장 거짓된 세상에 다정한 몸짓 속에 의미를 담아.”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이제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릴 지켜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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