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국문·99년졸) 톱클래스 편집장· '이어령, 80년 생각' 저자
김민희(국문·99년졸) 톱클래스 편집장· '이어령, 80년 생각' 저자

기자 생활 20년 차, 그동안 700명 넘는 이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연예인, 예술가, 학자 등 분야도 다양하고, 10대 소녀부터 80대 노학자까지 연령대도 다양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이 사람 진짜다!’ 하는 감동이 밀려올 때가 있다. 나는 이들을 ‘사람책 멘토’라고 부른다. 생각과 행동이 단단하면서도 우아해서 닮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찌르르 전율이 일면서 내 생의 파동이 미세하게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사람책 멘토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며, 약속을 잘 지키고, ‘옳은 세상’에 대해 항시 고민하며, 소신이 분명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타인의 목소리를 향해 활짝 귀를 열어놓는다. 이들과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역시!’ 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지독한 다독가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책이란 단순히 지혜나 지식 습득의 수단이 아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돕는 성장의 추동체로 삼는다.

최근에 만난 사람책 멘토들을 꼽아본다. 뮤지션 겸 작가이자 제주도에서 ‘책방 무사’를 운영하는 요조와 탁월한 시선의 높이를 가진 최진석 이사장이 떠오른다. 두 분 다 지독한 책벌레다. 지난 4월에 인터뷰한 요조는 “서점은 내가 나를 만나는 공간”이라며 “그즈음 나의 고민과 질문을 반사하듯 비춰준다”고 조곤조곤 말했다. 3월에 인터뷰한 최진석 (사)새말새몸짓 이사장은 “독서는 자기 자신에게로 걷는 고도의 지적 행위로,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법의 양탄자’”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에게 걷는 길은 어렵다. 그 길이 그토록 어려워서 우리는 다양한 인생의 질문 앞에서 때론 좌절하고 때론 목놓아 울기도 한다.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하듯 인생의 질문 앞에서 멘토가 필요하다. 그 멘토가 가족이나 친구, 선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멘토를 현실에서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질문과 방황에 대한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주변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내 인생 최고의 멘토는 책이다. 인생이 내게 정답 없는 질문을 수시로 던져댈 때마다 나는 서점에 들르고 도서관을 찾는다. 일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 내가 공중분해 될 것 같을 땐 강상중 교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폈고, 이 거대한 카지노 놀음판 같은 금융자본주의의 혼란 한 가운데에서는 김승호 회장의 ‘돈의 속성’을 꺼내 들었다. 내가 가 보지 않은 시대에 우리 아이를 시대에 필요한 인재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얻으려 마이크로소프트 이소영 이사의 ‘홀로 성장하는 시대는 끝났다’를 주문했고, 단군 이래 가장 극심한 세대 갈등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고 싶어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를 밑줄 그으며 읽었다. 최근엔 나의 쓸모를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들여다보려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전략가, 잡초’를 읽고 있다.

그때마다 책은 보물 지도가 돼 줬다. 어떤 책은 갈림길에서 힌트만 슬쩍 보여주지만, 어떤 책은 ‘그래! 이거야!’ 하는 선명한 해답을 던져주기도 했다. 책이 영상보다 좋은 건 나만의 속도로 읽을 수 있어서다. 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뒤지다 보면, 어떤 페이지는 3초 만에 넘겨버리지만, 또 어떤 페이지는 한 자 한 자 낭독하며 형광펜을 긋기도 하는데, 이렇게 나만의 문장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문장을 내가 좋아하는 펜으로, 내가 좋아하는 수첩에 필사하다 보면 그 문장의 가르침들이 세포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나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나 자신을 산문적 자아에서 시적 자아로 데려오고 싶을 때 수시로 보는 교과서 같은 책이 있다. 이어령 교수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 책을 펼치면 나른한 한낮의 낮잠 같은 시간을 지나 잃어버렸던, 아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유년시절의 감성 가득한 나를 만나게 해준다. 이성복 시인의 ‘오름 오르다’ ‘무한화서’,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도 글이 안 풀릴 때 수시로 꺼내 보는 책들이다.

내가 만난 최고의 사람책 멘토는 이어령 선생님이다. ‘창조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이어령 선생님의 자택에 있는 백년서재에는 수백 년 전에 쓰인 고전부터 인공지능의 최전선을 다룬 과학 잡지까지, 너른 한 벽에 7단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 책들이 선생님의 창조력의 질료가 돼 줬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선생님은 스스로를 “돌 때부터 책을 집어든 사람”, “어머니의 모음과 자음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길렀다”고 말씀하신다.

한때 천재란 하늘이 내려준 고정불변의 재능으로, 창조력이란 번쩍하고 스파크처럼 떠오르는 것으로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간다. 천재란, 창조력이란 차곡차곡 쌓인 노력과 질료들의 합주이자 결과물이라는 걸 점점 깨닫는다. 흔히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다고들 하는데, 무에서 창조되는 유란 없다. 유에서 더 큰 유가 창조된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책이다. 이어령 선생님이 걸어오신 80여 년의 여정 자체가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책은 친구이자 스승이고, 등대이자 삶의 방향타가 되어준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택한 저자의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다 보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어제보다 더 나은 나, 사려 깊고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해가도록 도와준다고 확신한다.

김민희 톱클래스 편집장‧‘이어령, 80년 생각’ 저자

∥인터뷰 전문 매거진 ‘톱클래스’의 편집장. 본교 국어국문학과를 1999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월간조선’, ‘주간조선’ 기자를 거쳐 현재 ‘톱클래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 700여 명을 인터뷰했다. 이어령 교수를 100시간 이상 인터뷰해 쓴 책 ‘이어령, 80년 생각’(2021)을 최근 출간했고, 앞서 ‘신 인재시교’(2014), ‘성공신화-파버카스텔’(201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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