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낸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다. 매일 일어나며 이 말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왜 사는 것일까.’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동시에 가장 절실히 답을 내려야 했던 이 질문에 수도 없이 베였다. 지금까지도 답은 찾지 못했다. 대신 나와 삶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후에 나만의 대답을 찾는 때가 오면 살포시 그 답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공간을 ‘살아내는 법’이라 명명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공부하는 법만 배웠다. 그리고 12년 동안 달려온 목표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난 ‘대학생’의 신분이 되었다. 목표지점을 넘기 위해 들었던 발을 다시 땅에 디디고 적응할 시간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감은 좀처럼 나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붙어서 그렇게 살아갔다.

이후 1년간은 그럭저럭 살 만했다.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과 멋진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기저에 있는 내 우울감을 들키면 사람들이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꾸 웃었다. 한참을 웃다 보면 진정으로 웃음이 많은, 언제나 밝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정으로부터의 도피가 나를 갉아먹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조금 조심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대학교 2학년, 하필 서로가 서로에게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난 많이 아팠다. 역류성 식도염과 장염으로 태어나서 약봉지를 제일 많이 받았던 날, 나는 누워서 하염없이 약들만 바라봤다.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나의 아픔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랫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불면증도 심해졌다. 버티기 힘들다고 수없이 말하는 내 몸에는 하나씩 자잘한 병명들이 늘어갔고 무기력함과 끝없이 마주했으며 감정을 요구하는 모든 것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또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일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현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구름을 바라보던 내게 문득 ‘하루만’이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왔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단지 ‘하루만’이라도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어디선가 굴러다니고 있던 메모지에 쓸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하루만 더 살아보자.라는 문장을 몇 번이고 써 내려갔다.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할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문장으로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오늘을 살아가자고, 내일을 살아내자고 다짐하니 피하기만 했던 내 일그러진 감정들을 하나씩 펼칠 수 있었다. 펼친 감정의 표면 위에는 한때를 추억하듯 가는 선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 나의 또 다른 하루로 인해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고백하는 다소 서툰 글을 쓰고 이 글이 학보에 나올 시점에도 어떤 이유이든 간에 사는 것보다는 경계에서 간신히 살아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늘도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고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 나의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로 느껴지길 바란다. 난 하루만 더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일 이 말을 반복할 것이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며, 한 달은 일 년이 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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