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은(언론‧15년졸) CJ ENM 커머스부문 PD
이도은(언론‧15년졸) CJ ENM 커머스부문 PD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의 나는 온통 흐릿했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잘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못했다.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거나 재능이 명확한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싫었다. 자주 길을 잃었고, 여러 시행착오를 했다. 그렇게 더듬더듬 여덟 학기를 마치고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가 가까워질 즈음 내 일기장의 모든 문장은 ‘두렵다’로 마쳐 있었다.

두려움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곧 후회로 번졌다. 시야가 흐릿해 헤맸을 뿐 부끄럽지 않은 대학 생활이라 자부했었는데, 취업의 문턱 앞에서 후회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찾아왔다. 나의 전공과 복수전공, 동아리와 기타 여러 활동 모두 목표지점을 알 수 없게 중구난방이었고 그런 이력으로 표현되는 나라는 사람은 그저 길을 찾지 못한 사람, 준비되지 못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무리 꾸며보려 해도 채용공고에 뜬 ‘경영지원’이랄지 ‘사업관리’랄지 하는 직무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일으켜준 건 어느 날 한 선배가 덤덤하게 건넨 말 한마디였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는 각자 저마다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그 가지들은 사실 모두 하나의 기둥에서 뻗어 나간 거라는 이야기였다. 실상 참 별것 아닌, 그리 대단하지 않은 말 한마디에, 나는 그제야 내 안의 무언가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가지의 끝만 보고 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쓸 수 있는 직무도 없고, 쓸 말도 없다고 여겼던 건 아니었을까.

‘엮는 기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내가 뚜렷한 목표 없이 마구잡이로 쳐왔다고 생각했던 가지들을 하나의 기둥에서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엮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어설프긴 했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무작정 엮어보기 시작했다. 때론 더 뒤엉켜 버리기도 했고 때론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대학 시절 내내 흐릿하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렇게 엮고 또 엮다 보니 가장 그럴싸한 모양으로, 가장 뚜렷하게 엮이는 지점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그 지점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홈쇼핑 PD라는 직업이었다.

 

대학시절 활동들 엮다보니 홈쇼핑 PD로 귀결돼

홈쇼핑 PD의 중요한 역량도 상품과 방송 엮는 기술

취업을 위해 ‘엮다 보니’ 얻어걸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막상 7년째 일을 하면서 느끼는 건 공교롭게도 홈쇼핑 PD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 바로 엮는 기술이라는 점이다. 홈쇼핑 방송은 준비부터 생방송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말 그대로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PD의 엮는 기술에 의존해서 이뤄진다. 결국 나는 엮는 기술로 구직을 했고, 엮는 기술로 지금까지 밥벌이하는 셈이다.

홈쇼핑 PD는 쉽게 말하면 상품과 방송을 엮고, 방송과 고객을 엮는 사람이다. 상품과 방송을 엮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정보를 엮어야 하고, 방송을 매출로 엮기 위해서 역시 수많은 요소를 방송이라는 매체로 엮어내야 한다. 한 시간의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PD가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자면 상품을 만든 협력업체, 상품을 소싱한 MD, 쇼호스트 캐스팅 담당자, 쇼호스트, 분장실과 의상실, 방송 자막 디자이너, 세트 디자이너, 영상 그래픽 디자이너,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비디오 감독과 오디오 감독, 기술 총괄 감독, 세트 설치팀, 세트 DP팀, FD, 심의담당자, 전화 상담원, 품질 담당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송을 시청하는 고객 등이 있다. 이 모든 사람, 그리고 이 사람들이 하는 모든 업무를 엮어내는 게 바로 홈쇼핑 PD의 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먼저 홈쇼핑 PD는 고객이 그 상품을 매력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필수적인 정보들만을 엮어 최적의 설명방식을 구성해야 한다. 상품을 만든 업체 입장에서는 제 자식은 가시가 있어도 함함한 고슴도치 부모 마음이라 상품의 A to Z를 방송에서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청자가 홈쇼핑 채널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야 1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채널은 가차 없이 돌아간다. 그러므로 PD는 수많은 상품 정보 중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객이 임팩트를 느낄 수 있는 두세 가지의 셀링 포인트를 찾고, 그 포인트를 엮어 하나의 방송 콘셉트를 잡는다.

콘셉트와 설명방식을 정했다면 다음은 그 상품을 방송적으로 어떻게 엮어낼지, 즉 방송을 어떻게 연출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상품을 설명할 방송 자막을 작성하고, 방송에 필요한 다양한 영상을 만들고, 세트와 조명, 소품, 쇼호스트 의상까지도 상품과 잘 엮이도록 연출하는 게 PD의 역량이다.

홈쇼핑 방송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셀링 포인트를 방송에서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청소기의 흡입력을 강조하고 싶다면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보여주는 게 가장 강력한 한 방일까? 스튜디오에서 지저분한 먼지들을 직접 흡입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청소기로 무거운 볼링공을 들어 올리는 시연을 할 수도 있고, 공인기관에서 인증받은 흡입력 수치를 패널에 적어 보여줄 수도 있고, 유명 연예인이 추천하는 영상을 볼 수 있고, 고객의 상품평을 볼 수도 있고, 그 외의 수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 어떤 방법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일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홈쇼핑 방송 연출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채널의 PD에게는 요구되지 않지만 홈쇼핑 PD에게만 요구되는 ‘엮는 기술’이 있다. 엮는 기술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은, 바로 생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고객의 마음을 엮어내야 하는 기술이다. 홈쇼핑 PD는 실시간 주문 현황과 주문 고객 데이터를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화면을 보여줬을 때 고객 반응이 가장 좋은지를 체크하고, 그에 따라 실시간으로 연출의 방향과 전략을 수정한다. 방송 전까지 준비했던 다양한 총알들을 상황에 따라 새롭게 풀었다가 엮었다가를 반복하며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일. 다른 그 어떤 ‘엮는 기술’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이것이 최고 난이도가 아닐까.

사실 직장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나의 많은 부분은 흐릿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하지만 더는 예전처럼 흐릿함 때문에 괴롭거나 흐릿하다는 이유로 내가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엮고 또 엮다 보면 언젠가는 선명해지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눈앞이 뿌옇다고 느끼는 수많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로 인해 혹여 두려워하고 있거나 혹은 괴로워하고 있다면 지금 잠시 눈을 감아보았으면 한다. 지금 초점이 맞지 않는 건 잔가지의 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고, 그 잔가지들을 엮고 또 엮어내면 자신도 몰랐던 아주 단단하고 멋진 기둥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다시 눈을 떠보자. 아주 조금은 선명해진 기분을,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도은(언론‧15년졸) CJ ENM 커머스부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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