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년, 주제를 좁혀 관심 있는 분야를 깊게 탐구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적의 일이다. 사실 당시의 나는 글을 읽고 쓰길 좋아하면서도 우리 문학에는 큰 애정이 없었으며, 이 사실을 크게 부끄럽게 여겼고 그런 마음을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발견한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다가 글감을 잡았다.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그런데 왜 잘 보이지 않지? 확인해 보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한국현대여성문학사의 흐름-1980~90년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소논문을 썼다. 누가 어떤 글을 썼는지 큰 줄기의 흐름을 알고 나면 더 이야기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주, 개요를 작성해 갔을 때 해당 시기에 활동한 국내 여성 작가로 누가 있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기억을 짜내 더듬더듬 답했던 이름은 부끄럽지만 신경숙, 공지영, 그리고 김승희 시인을 비롯한 시인 두어 명 정도였다. 학기가 끝날 즈음 나는 결론부에 이렇게 적었다. “오랜 세월 여성 문단은 소외된 영역이었고 문학적 성과에 비해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중략) 여성문학이라고 하면 기울어진 사회에 대한 여성의 투쟁을 그려낸 작품으로 단정 지어 생각하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 여성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연구를 해 나가는 것은 남성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던 문학 연구의 균형을 맞추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시대에 맞게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

서론부터 결론까지 오로지 나의 의지로, 고민을 그치지 않으며 오랜 시간 공들여 작성한 최초의 글이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채로 몇 자 적었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부채감이 오래도록 남았다. 그해부터 여성 작가 작품이라면 편식 없이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여성 문인의 글이 문학이 아닌 ‘여성 문학’, 심지어는 ‘여류 문학’의 범주로 분류되었던 시절이 있다. 그 경계가 희미해진 것을 기쁘게 실감한다. 2018년 소셜 미디어에는 해시태그 “#2018_여성작가”가 등장했고 높은 파급력을 보였다. 이 흐름은 해가 바뀌며 “#2019_여성작가”로 빈틈없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2021년은 어떠한가?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내 책장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에 글을 읽고 숨을 쉬고 있다니 무척이나 반갑고 감사하고 기쁜 일.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일, 이 명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했으면 좋겠다. 서가에서 무엇이든 한 권 골라 펼치면 그 이야기는 틀림없이 나의 이야기, 그 안의 ‘나’는 나일 것이라고. 이야기가 내 것같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할 말이 많아진다.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질문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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