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철 약학과 초빙교수
정호철 약학과 초빙교수

대학원 유학 시절 나의 체력을 키운 건 8할이 라켓볼이었다. 유학 첫해, 라켓볼이 미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란 말에 솔깃해 운동도 하고 미국인 친구도 사귈 겸 시작했는데 꾸준히 즐기는 ‘최애’ 종목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이 아닌 살모넬라균과 동고동락하며 지내던 시기였다. 이 무심한 생명체와 전생에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시간 넘게 벽에다 힘껏 공을 후려치고 나면 극심한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가시면서 위장이 말끔히 청소되고, 이마 위 송송 얹힌 땀에는 청춘의 끓는 피가 몇 방울 섞여 있는 듯했다. 내가 공부하던 유타대 캠퍼스는 로키산맥의 한줄기인 와사치 산맥 기슭에 위치한, 고도 1500미터를 훌쩍 넘는 고지대였다. 처음에는 쉽게 지치거나 코피가 나는 등 적응기가 필요할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꽤 격한 라켓볼을 꾸준히 친 덕분에 체력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다.

몇 년을 치다 보니 구력이 쌓여 미국인 친구들은 몰라도 한국 유학생 중에선 나를 이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유일하게 경제학과 한 분은 ‘넘사벽’이었다. 동작이 민첩한 건 아닌데 유도선수처럼 우람한 체격에서 뿜어 대는 볼의 위력과 속도에는 수년간 닦아온 나의 라켓볼 기술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독서는 뇌의 기초체력 키우는 일

어떤 분야든 전문지식만으론 한계 있어

그때 절실히 깨달은 건 내가 기초체력이 달린다는 사실이었다. 소싯적 아령 한번 들어 본 적 없었고, 어리석게도 근육운동은 공부에 관심 없는 애들의 소일거리 정도로 치부했다. 이를 계기로 늦게나마 근육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라켓볼 실력도 눈에 띄게 늘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지치지 않고 연구 능률도 배가되는 경험을 했다.

독서가 바로 이런 기초체력을 키우는 일이 아닐까 한다. 뇌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일 말이다. 어떤 분야의 일을 하건 그 분야에서 익혀야 할 전문지식만 가지고선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일견 내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여기던 인문학책의 한 구절에서 번뜩 눈을 뜨게 될 때가 있다. 그뿐 아니라 독서는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고 때로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내게 자크 모노(Jacques Monod)의 ‘우연과 필연’은 특별한 책이다.

내가 실로 감동했던 건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아니었다. 젖당 오페론(Lac operon)이라는 유전자 발현의 조절 기전을 최초로 규명한 프랑스 과학자가 이런 철학적 냄새 폴폴 나는 책을 썼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 책은 내 어린 마음에 ‘유전학을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다’라는 꽤 순수한 희망을 심어줬다. 대세에 휘둘려 미국 유학을 택했지만 이러한 까닭에 프랑스는 내게 오랫동안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던” 가지 않은 길이었다.

독서는 새로운 관점을 이해하게 하고 공감 능력을 키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킨다. 막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충분한 근거가 있다. 각 분야의 많은 대가가 독서가 성공의 밑천이었다고 말한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 정치지도자뿐 아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가인 워런 버핏과 IT 성공 신화의 주인공 빌 게이츠는 엄청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워런 버핏은 그의 성공 비결을 묻는 말에 책상 위에 쌓인 문서 더미를 가리키며 매일 500페이지 정도를 읽어 내는 거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쌓인 지식은 복리로 불어나는 법인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부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매일 최소 한 시간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150페이지 분량을 속독하며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어낸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은퇴하고 게이츠 재단을 설립해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로 키운 것은 ‘매해 300만 명의 아동이 설사로 사망한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본 뒤였다. 누군가는 어떤 글을 읽고 수백만 명의 생명을 살려내고 또 누군가는 독서로 터득한 지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이쯤 되면 무엇을 원하건 어떤 분야의 일을 하건 독서를 게을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워런 버핏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좋다는 독서도 막상 원하는 만큼 실천하기란 만만치 않다. 엄청난 독서광까지는 아니더라도 효율적인 독서 습관을 키우면 나름 원하는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바쁜 일과 속에서 틈을 내 과연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 독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를, 어느 한 분야의 편식 독서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걸 권하고 싶다.

독서의 목적에 따라 무슨 책을 읽을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내 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과잉 공급되는 정보들을 적절하게 차단하지 않으면 그 홍수에 묻힐 판이다. 아무리 수재 소리를 듣는 사람일지라도 뇌의 CPU는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정보를 직접 취할 게 아니라 누군가 지식의 형태로 잘 정리해둔 책을 읽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이 지식의 축적이 매우 중요하긴 하나 내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문학 서적을 뒤적이곤 한다. 그러다 가끔 누군가 혼을 갈아 써 내려간 글귀 속에서 지혜의 샘물과 마주한다.

내가 독서광은 아닐지라도 부실한 근육으로 라켓볼 기술로만 승부를 탐했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는 있는 것 같다. 그때 잘못을 조금 일찍 깨닫고 기초체력을 키웠더라면, 유타를 떠나기 전 그 경제학과 선배를 통쾌하게 이겼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 종교지도자 같은 성품을 지닌 후배로부터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시공주니어, 2017)이란 책을 선물 받았다. 본인의 인생 책이라며 권하는데 서두엔 이렇게 씌어 있다. “‘더 나은’ 삶 - 진정한 혁명의 존재를 믿어 보자.” 이 봄, 저마다의 부푼 꿈을 안고 “날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화인들에게 이 믿음을 권해 본다.

정호철 약학과 초빙교수

* 미국 유타대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UCSF와 UC버클리에서 박사후 연구를 수행했다. 미국과 한국의 산업체에서 연구, 개발, 컨설팅 등을 맡았고 2014년부터 본교 약학대학 글로벌 전문인력 양성 사업단 담당 교수로, 2020년부터는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분자생물학, 약물유전체학, Academic Writing 등을 강의하며 개인유전체가 신경정신계 질환의 발병민감도 및 약물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등산을 즐기며 가끔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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