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위한 인턴, 인턴을 위한 동아리, 학회, 스터디, 공모전, 자격증 시험, etc. 취업의 종착역으로 가는 모든 정류장이 상향 평준화된 한국 사회. “여러분, 여기 휴학을 하고 아무런 스펙도 쌓지 않은 대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과연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요!”

모종의 이유로 지난 학기 휴학(休學)을 했다. 첫 휴학이 하필 코로나에 점령당한 세상이라니. 한 학기를 “나는 나와 놀았습니다”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반년의 시간이 내게 남긴 건 무엇이었나.

나는 매일 기록했다. 기록이라고 꼭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본 영화가 됐든, 읽은 책이 됐든, 경험한 일상이 됐든. 그저 내 삶의 일부를 꾸준히 세상에 남겨보았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워드 파일 등 이곳저곳에서 내 발자취를 가득 담아주었다. 좋은 세상이지 않은가. 무엇을 하든 플랫폼이 준비된 세상이다.

사실 ‘의식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건 1년 정도 됐다. 그전까지는 단지 SNS를 일기장처럼 사용하는 재미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기록 행위였다면,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기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상 아이템을 떠올려야 한다는 생존적인 강박에, 본격적으로 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 와서 어느덧 4년째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새로운 영상을 시작할 때마다 높은 절벽 아래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좋은 아이템 하나를 떠올리면 비로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이다. 도무지 참신하고 새로운 소재가 생각나지 않아, 아주 작은 아이디어의 원천조차도 머릿속에 남겨두어야 했다. 그 사소한 것이 좋은 기획으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꿈을 꾸다 일어나도 ‘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써먹으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면, 비몽사몽으로 휴대폰 메모장에 간신히 기억을 남겼다. 언젠가 이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 하나 정도는 내놓고 마리라는, 원대하고 철없는 꿈을 안은 채 기록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레퍼런스’는 생명줄이 아닐까. 휴학하면서 영화를 많이 본 이유도, 다른 이의 작품을 보며 새로운 시각을 얻고 새로운 소재를 끌어내 보기 위함이었다. 영화마다 마음에 들었던 연출을 기록하고,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또 기록하고 ... 좋아하는 해외 록밴드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도 그냥 감상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눈에 들면 메모해야 했으니. 물론 레퍼런스가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새로운 관점을 빌려 봐 보는 것만으로도 영상 제작에 큰 힘이 된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들어도 기록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이 웃긴 일화를 말해주거나 친구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곧이어 ‘이런 이야기를 써보면 재밌겠는 걸?’이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스카이캐슬’의 우주 엄마가 이런 심정이었던 걸까. 도대체 내가 나중에 뭐가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렇게 적어 둔 것들로 새로운 글을 써보기도 했다.

물론 휴학하는 동안 기록한 것들이 단지 영상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내게 남긴 건, 나를 알아가는 측면에 가까웠다. 세상은 빠르고 무책임하게 돌아간다. 쉴 틈 하나 안 준 채. 그런 세상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새로운 취미를 찾고 개발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인턴을 했다거나 자격증을 땄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만, 휴학은 사실 쉴 휴(休)에 배울 학(學)자가 아닌가. 물론 걱정이 안 됐다는 건 거짓말일 테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됐기에, 그것만으로도 나의 첫 휴학은 꽤나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해본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99년 된 영화를 시청했다. 그 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중에 현재 살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세상이지 않은가. 가끔 이 세상에 왜 내던져진 건지, 끝이 존재하는 타임라인 안에서 아등바등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는 혼란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기록은 그럴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내가 남긴 것들을 통해 나는 나의 실체와 실존을 다시금 찾는다.

꾸역꾸역 연필로 눌러쓴 일기장과 독서록을 검사받던 초등학생은, 이제 스마트폰 하나를 손에 쥔 채 세상에 기꺼이 자신을 남겨본다. 나의 타임라인이 멈추어도 내 발자취는 미약하게나마 존재하기를. 아, 기록하기 딱 좋은 세상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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