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을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을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018)이라는 영화가 있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영국과 프랑스 사이 해협에 위치한 건지 섬(The Island of Guernsey)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게 점령됐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주민 몇 사람이 독일군의 강제 공출을 피해서 몰래 돼지구이를 먹다가 적발될 위기에 처하자, 북클럽을 하느라 모인 것이라고 둘러댄다. 돼지구이와 함께 먹었던 음식이 감자껍질파이였기에 얼떨결에 이것이 모임의 이름이 된다. 그 후 정말로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이는 북클럽으로 발전하게 된다.

‘북클럽’(2019)이란 영화도 있다. 네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북클럽을 매주 했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모임이 이어진다. 다음에 읽을 책은 돌아가면서 정하고, 책을 정한 사람이 네 권을 구입해 미리 나눠준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영화로도 알려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야한(?) 책을 선택해 함께 읽게 되는데, 책의 영향 때문인지 각자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오게 된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는 내용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제목 때문에, 즉 제목에 ‘북클럽’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들을 봤다. 영화 속에서 북클럽이 어떤 식으로 운영될지가 무척 궁금해서였다. 그만큼 내 생활 속에서 북클럽이 소중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또는 친구 아닌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미리 읽어오기로 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 즉 독서 모임 또는 북클럽(book club 또는 literary society)과 내가 처음 만난 때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매주 한 번씩, 책을 정한 친구가 발제(내용을 간략히 요약·소개)하고 난 뒤 자유롭게 토론을 벌였다. 이미 친했던 친구들과 이 모임을 시작하였지만, 독서 모임을 가지며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때 읽었던 책들의 제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E. H. 카(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당시 대학생들이 흔히 읽는 필독서를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독서 모임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이야기를 했었고, 학생 식당에서 밥을 나눠 먹었고, 수업도 같이 듣고 시위도 같이했으며, 순대에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하고,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 나누었다는 아련한 추억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 북클럽은 ‘가장 아끼는 친구들’과 거의 동의어였다. 각자의 개성과 관심은 모두 달랐지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상당 부분 공유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구들 내면의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대학 동창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고, 가끔 모여 식사하고 수다 떠는 시간을 갖는다. 안타깝게도 이 모임은 이제는 북클럽은 아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018)의 한 장면. 출처=다음영화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018)의 한 장면. 출처=다음영화

대신에 나는 다른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다. 매달 한 번씩 모이는데, 발표자가 미리 선정한 책에 관해 한 시간 발표를 듣고 한 시간 토론을 벌인다. 모임의 구성원은 대부분 나보다 연장자이고 직업도 모두 다르다(같은 직업을 가진 회원을 두 명 두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어쨌든 매달 의무적(!)으로 (각자의 직업과는 무관한) 한 권의 책을 읽은 뒤에, 그 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모임을 나는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래서 꼬박꼬박 참석하게 되고, 정해진 책은 꼭 읽으려고 노력하며, 보통은 그 책과 관련된 다른 책들까지 함께 읽는다.

그달에 읽을 책은 보통은 구입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기도 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그러다가 그 옆에 놓여 있는 책들도 함께 빌리게 되어, 결국은 원래의 계획보다 많은 책들을 빌려서 읽게 되는 것은 항상 행복한 경험이다.

이것은 대학 시절부터의 나의 습관이었다. 다 읽지 않고 반납할 때도 많았지만, 일단 도서관에 가서 왕창 책을 빌렸다. 너무 자주, 정기적으로 대출을 하다 보니 도서관의 담당 직원분과는 아주 친해지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이, 책 읽는 일을 중요한 부분으로 하는 현재의 직업을 가지게 된 데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학생 때나 지금이나 전공 책보다는 전공과 무관한 책들이 더 재미있고 끌린다. 또한 혼자서 좋은 책을 읽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 직업과 배경을 가진 분들과 함께 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은 정말로 재미있다.

작년부터는 코로나 때문에 북클럽도 줌(zoom)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예일대 로스쿨의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가 쓴 책 ‘엘리트 세습: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세종서적, 2020)을 읽었다. 이 책을 선정한 회원께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보충해 발표하셨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회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토론과 발표 내용을 요약해서 저자인 마코비츠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을 받기도 했다. 앞으로도 책의 내용에 관하여 저자와 더 토론을 이어갈 생각이다.

이번 달에도 북클럽 모임이 기다려진다. 이달의 책은 ‘인간 공자, 난세를 살다: 실패했지만 위대한 정치가’(메디치미디어, 2020)이다. 이 책은 공자의 전기인데 매우 독특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공자는 ‘논어’를 통해 이상화된 성인의 모습이다. 이 책은 ‘인간’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주나라 시대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게 관건이라고 본다. 특히 춘추 시대 정치사의 맥락에서 공자의 ‘실패했기에 더욱 위대한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북클럽이 왜 큰 행복감을 주는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책’ 그리고 ‘친구’라는, 우리 삶에 있어서 귀중한 보물 두 가지를 한꺼번에 누릴 기회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여러분을 북클럽으로 초대하고 싶다. 당장 이달부터라도 친한 친구들 몇 사람과 함께, 책 한 권 정해 읽고 수다를 떠는 모임을 시작해 보시지 않겠는가?

서을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 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본교에 부임했으며 학부에서는 <시민생활과법>과 <민법총칙>, 로스쿨에서는 <민법>, <법제사>, <로마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과 강의를 통해 만나는 일을 가장 기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비대면 시대에 강의의 질을 향상시킬 방법에 대해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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