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신입생 첫 학기에 최재천 교수님 강의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큰 울림을 받지 못했다. 종강일에 교수님께서 그 말을 종이에 적어 사인과 함께 주셨다. 서랍 맨 밑 칸에 보관해뒀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구절이 내 인간관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쳐왔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고 지낸다면 그에게 혐오를 쏟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대를 모르면서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을 때 혐오에 기반한 폭력은 쉬워진다.

슬프게도 세상에는 혐오를 당하는 정말 많은 대상이 있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종종 혐오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퀴어, 기독교, 여성을 통해 혐오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는 뉴스 댓글을 처음 봤을 때, ‘여성인 나’의 기분은 멍석말이를 당한 심정이었다. 사람을 멍석에 말아 뭇매질을 하면, 패는 사람들은 멍석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 때문에 죄책감 없이 상대를 때릴 수 있다. 혐오를 분노로 표출하는 것은 상대를 멍석말이하는 것과 같다. 똑바로 보지 않고 그저 내리치기만 하면 된다.

혐오라는 감정을 내가 직접 느껴보기도 했다. 종교와 엮인 문제로 누군가에게 편견과 미움을 가졌을 때다. 믿음을 강요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로 인해 내 안에서는 기독교 집단에 대한 비틀린 이미지가 자라났다. 어그러진 내 관점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을 무작정 꺼렸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은 곱씹을수록 쓴 독초와 같아서 담고 있는 내가 더 아렸다. 본교 기독교학과 교수님들의 수업을 접한 것은 내게 전환점이 됐다. 해당 학과 교수님들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어 기독교를 공부해본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슬람, 기독교 등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됐다. 이 역시 이화에서 얻은 수많은 것 중 하나다.

퀴어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을 겪었다. 퀴어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관용을 베푸는 듯한 태도로 퀴어를 받아들였다. 시혜적이고 바보 같았다. 가까이 있는 퀴어 지인들을 알게 된 후에는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닌 내 주변의 사정임을 인식했다. 내 무례한 시선을 깨치고 새로이 세상을 보는 계기가 됐다.

혐오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알아갈 기회’다. 여성 혐오 댓글을 맞닥뜨림으로써 여성학 담론에 관해 진지하게 알아갈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본교 기독교학과 수업을 접함으로써 편협했던 미움의 감정이 허물어졌다. 우연히 그리고 당연하게 인생에서 맞이하게 된 퀴어 지인들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 지식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쌓이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람에 애정을 가지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을 알아가는 것에 기반한다. 철학이 지혜, 결국 앎을 추구하는 이유는 이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철학에서 앎은 곧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던 백지 같은 마음에 편협함이 깃들었다가 그 협소함이 나름대로 마모되기까지 2년이다. 마음을 예리하게 벼리지 않으면 편협함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는다. 여전히 이화 안에서 내 시각은 변하는 중이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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