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님. 타대 경영학과 학생 수 답변 왔나요?”

지난주 경영대 수강신청 기사를 준비하며 우리는 수치와의 싸움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여러 이유로 기사에 싣지는 못했지만 통계를 사용하려고 애썼던 이유는 통계만큼 독자들에게 심각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수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간지 기사들도, 여러 기업 및 기관들도 우리와 같은 이유로 통계를 사용한다. ‘국내 사망자 수 1612명, 청년 실업률 9.5%,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1.0%’ 지금까지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사용됐던 수치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본래 사용되는 의도와 다르게 난 이러한 숫자에 둔감해져 갔다. 증가와 감소 정도만 확인했을 뿐, 그것이 가진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요양병원 환자들이 ‘1년’ 동안 가족들을 못 만났다는 기사를 보면서도 마찬가지로 ‘1년’이라는 수치에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나는 그 속에 있는 아픔을 직접 마주했다. 며칠 전 아버지 휴대폰 검색 기록에 ‘저체온증 사망’이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이야기다. 왜 이런 걸 검색했냐고 아버지께 묻자,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계신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날 아버지는 저녁을 드시며 큰아버지와 통화했다. 아버지는 통화에서 “형이랑 엄마는 그래도 지난주에 아빠랑 통화해서 다행이다”며 “나는 아빠 근래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전화를 옆에서 들으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산소 호흡기를 다신 상태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또한 방역지침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응급실로 모셔 곁을 지킬 것인지 고민했지만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장소를 옮기는 중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병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서야 ‘1년’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를 실감했다.

그렇게 난 직접 아픔을 겪고 나서야 내가 보는 숫자 안에 여러 사람들의 삶이 존재했음을 인지했다. 동시에 감염차단을 이유로 요양병원 내 환자들에게 가족과의 면회를 금지한 정부가 숫자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지 못했던, 그저 숫자에 둔감해지던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요양병원에서의 감염 차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규모 감염 사건들 중 요양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환자 중 대부분이 고령 환자인 요양병원의 특성상 코로나19에 특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는 요양시설 환자와 가족이 면회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9개월 간 가족을 못 만난 환자의 어휘가 약 20단어로 줄어든 사례, 만성 고독이 조기 사망률을 약 20%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와 함께 면회 제한을 완화한 미네소타주와 뉴욕주 상원의원의 노력을 전했다. 이렇게 그들이 노력하는 이유는 코로나 감염자 수 안에 있는 요양병원 환자들의 삶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태도의 차이는 비단 요양병원의 문제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수치에만 매몰되어 국민의 삶을 보지 못하고 내린 방역 조치들에 대해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감염자 수 추세에 따라 단순 거리두기 강화와 완화를 반복하는 것에 학교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자영업자까지도 한계라고 토로한다.

결국 정부는 숫자 안에 있는 국민들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경우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잠깐 반성하고 끝낼 수 있지만, 정부의 그 태도에는 국민의 삶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