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었다 한다면 이미 두 번이나 삼킨 시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겠다. 카운트다운을 들으며 2020년과 함께 스물세 살을 날려 버린 것이 첫째요, 떡국을 먹음과 동시에 스물네 살도 같이 먹어버린 것이 둘째이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이라면 누군가는 공감하겠지만, 나는 3월이 되어 수업을 맞이해야만,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왕창 생기고 나야지만 비로소 제 나이가 생겼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직 스물셋이라고, 아직 3학년이라고 그렇게 애써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다.

 그러나 나의 믿음과는 별개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10일 후에는 더 이상 도피할 명분은 사라지며, 지금 나의 스물셋은 끝나간다. 스물 둘이 될 때도, 셋이 될 때도, 나이는 무의미한 숫자 놀이에 불과하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무엇이 된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20대 초반의 패기였을까, 혹은 친구들보다 1년을 늦게 살아가는 나의 방자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라면 이제는 내가 정말 두려움에 떨 나이가 된 것일까.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글을 타고 세상을 유영하고 싶었고, 한 글자마다 세상을 눌러 담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마음 한 켠에 이런 파릇파릇함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치만 사회는 여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한가하게 풀을 기를 때가 아니라 불을 피워야 한다고들 한다.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젠 정말 사회로 나가야 할 때라는 걸 안다.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 같이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취업을 하고, 주변에서는 ncs니 직무니 초봉이니를 떠들고, 대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을 애인으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가 되었다. 나라고 다를 소냐. 임용 준비 카페에 들어가서 합격수기를 찾아보고, 광화문 교보문고의 J열에서 지식인마냥 시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건너편에서 개론서를 뒤적이고, 당장 내일모레면 초수생의 신분이 되는 시간 앞에서 하염없이 불안만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 앞에서 내가 기르던 풀은 한없이 시들어가고,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물을 주지 않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의 자괴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듯하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배웠다. 더불어 살아가는 게 사회라고 배웠다. 만약 공교육이 옳다면, 행복도 슬픔도 남과 나누는 세상이라면, 불안 또한 전이된다. 설령 그 와중에 굳건히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내가 아니다. 나는 관계를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이다. 그 관계 속에서 받는 영향이 나를 만들어간다. 모두에게 스물넷이 불안정의 시기가 맞다면, 나 또한 흔들릴 것임을 확신한다. 언젠가는 시인의 꿈을 멈출 날이 올지도 모르고, 또 언젠가는 나의 아가미가 되어주는 글을 스스로 떼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스물넷이 되어 버릴까 봐, 나는 그게 두렵다. 그러고도 불씨조차 피우지 못할까 봐, 내가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렵다.

스물넷은 무엇일까. 어떻게 오지도 않았는데 겁을 줄 수 있는 걸까. 혹시 스물넷은 무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일까.

안개를 꾹꾹 눌러 주머니에 담아가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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