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만 독어독문학과 교수. 사진제공=한겨레
최성만 독어독문학과 교수. 사진제공=한겨레

이 칼럼 시리즈의 제목인 ‘읽어야 산다’를 생각해봤다.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양서를 읽는다는 뜻임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것은 책만이 아니라 실로 다양하다. 우리는 철자나 텍스트만이 아니라 카드, 차 시간표, 별자리, 여러 기호와 상징, 표정, 풍수지리, 그래픽, 음표, 수학 공식들을 읽는다. 영상을 본다는 것과 차별하여 영상을 읽는다고도 표현한다. 즉 ‘읽다’ 또는 ‘읽어내다’는 대상을 이해한다, 알아차린다는 뜻도 담고 있다. 독일어에서는 곡식이나 포도를 수확할 때 좋은 알갱이와 열매를 열악한 것들이나 쭉정이로부터 선별하고 가려내는 것도 읽는다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뭔가를 읽으면서 별문제 없이 세상에 적응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제대로 살려면 제대로 읽어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읽는다는 것은 대상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각에 와 닿은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 선별하기, 정확하게 이해하기, 해석하기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글을 읽을 줄 알아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 과연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해력(literacy)은 글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 즉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누구의 가치와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가, 어떤 의도가 있는가 등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글의 철자를 읽을 줄 안다고 해서 그 글의 맥락을 읽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읽기에 등급과 (정치적, 도덕적)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문해력은 해독 능력을 가리키고 해독 능력에는 수학처럼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도 있지만, 해답을 찾아가는 방법으로서 해석의 관점과 체계도 포함된다. 즉 문해력에는 상상력과 사유의 힘이 포함된다. 이 문해력은 통상 독서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훈련되고 함양된다. 결론적으로 ‘읽어야 산다’라는 칼럼 시리즈의 제목은 ‘제대로 살기 위해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달리 말해 SNS처럼 아무렇게나 쉽게 읽고 되는 대로 사는 것과는 다른 읽기와 삶을 생각하라는 주문이 들어 있다.

 

독서와 일기쓰기에 빠졌던 아웃사이더 공대생

1970년대 중반까지 지방의 한 도시에 살아온 나는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독립된 삶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20여년을 시골에서 부모님과 학교의 보호와 억압 아래 모범생 또는 모범수로 살아오다가 엄청난 자유의 공간으로 추방된 나는 내 앞에 탁 트인 그 자유의 공간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공대 전자공학과라는 잘 나가는 전공을 선택했지만 정작 전공에 적응하지 못한 채 긴 방황의 수업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그려온 대학, 전공, 졸업, 유학 또는 취직으로 이어지는 삶의 공식은 무너졌고 나는 내게 강요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반항아와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렇다고 방탕한 일탈의 삶을 누릴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부모님이 부쳐주는 하숙비도 빠듯해서 늘 쪼들렸으니까. 나는 게을리 하게 된 전공공부에 대한 심리적 보상으로 독서와 일기 쓰기에 빠져들었다. 읽은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별로 없었던 내게 일기는 나 자신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1979년 4월, 최 교수가 대학원 1학기 때 쓴 일기. 당시의 자화상이 스케치 되어 있다. '지극히 불안한 나의 초상'이란 메모와 함께. ⓒ최성만 
1979년 4월, 최 교수가 대학원 1학기 때 쓴 일기. 당시의 자화상이 스케치 되어 있다. '지극히 불안한 나의 초상'이란 메모와 함께. ⓒ최성만 

책을 읽고 나면 나는 그 책의 유령에 씌운 듯 한동안 읽은 책의 작가나 인물들과 함께 살았다. 일종의 ‘계속 쓰기’를 한 것이다. 계속 쓰기는 모방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복제가 아니다. 계속 쓰기를 하다보면 저절로 패러디와 아이러니가 섞여들며 대상을 변형하고 변주하게 된다. 작가도 이렇게 자신이 몰입해서 읽은 책에 대한 일종의 계속 쓰기를 하며 탄생할 것이다. 이것이 미메시스의 비밀이다.

책에 미메시스하며 탐닉하다보면 그 영향 아래 있지만 어느새 그로부터 벗어나려 상상력이 꿈틀거린다. 자연과학적 상상력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배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가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법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감이나 천재는 고전에 대한 충실한 모방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다만 어설픈 모방으로 그치면 평생 그 대상에 종속된 채 아류로 남을 것이고, 반대로 모방 과정을 생략하면 무지한 상태에서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며 헛똑똑이로 살게 될 것이다.

하여간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쓰면서 시간을 마냥 허비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다. 내가 읽은 책은 주로 문학작품과 철학서였다. 철학서라고 해도 칸트나 헤겔과 같은 본격적인 철학서를 읽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고, ‘논어’나 ‘장자’, 플라톤의 ‘향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몽테뉴의 ‘수상록’, ‘채근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책들이다.

특히 괴테의 ‘잠언과 성찰’, 니체의 잠언들, 카프카의 ‘죄, 고통, 희망과 진실한 길에 대한 성찰’과 같은 아포리즘을 좋아했다. 시와 소설, 철학서를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고, 강연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새겨둘 만한 가르침과 경구들을 적어두는 습관을 지금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 삶을 준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최 교수는 일기 공책 스무 권 가량을 오래된 가죽가방에 보관한다. 대부분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 쓴 것으로, 세상과 자신에 대한 쓰디 쓴 성찰이 주로 담겼다. ⓒ최성만 
최 교수는 일기 공책 스무 권 가량을 오래된 가죽가방에 보관한다. 대부분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 쓴 것으로, 세상과 자신에 대한 쓰디 쓴 성찰이 주로 담겼다. ⓒ최성만 

 

책을 찾는 호기심, 절박함은 어디서 솟나

나는 평생 대학 1, 2학년 때만큼 많은 책을 읽었던 적이 없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홍수에 쓸려 가듯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읽으려고 찜해 둔 책들을 마음잡고 읽으려고 한두 학기 휴학할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책 읽는 시간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읽은 책들의 세부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 내가 읽은 책들이 어느덧 피와 살이 되어 몸속에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고, 낯선 세상에 던져져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내고 조급함을 다스릴 약간의 자신감과 용기를 주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이 사람들을 책 읽기로 추동할까. 교육제도의 틀 내에서는 동기부여나 강박감이 있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읽도록 스스로 또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추동한다. 그러나 교양을 쌓기 위해 읽는 책들은 특정한 목적으로 읽는 책이나 의무로 읽는 책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효용성이 보이지도 않고 그 범위도 넓다. 결국 그 책들을 찾게 만드는 호기심이나 실존적 절박함이 내면에서 솟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나 절박함은 설명할 수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자신과 세상을 돌아볼 여건도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한가함과 여유로움도 스스로 갈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면 다시 호기심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진정한 호기심과 동경은 충족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기심과 동경을 키워낸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미래의 삶과 직업에 영향을 줄 상상력과 사유의 힘도 더불어 키워낸다. 젊은이가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대개 자본처럼 비용효율성과 같은 목적합리성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 또한 세상은 삶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 하지만 진짜 즐거움(진국)이 아닌 것들, 가상적인 분주함으로 가득하다. 그것들이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대체하고 가로막으며, 영혼을 키우고 인식 지평을 넓혀줄 독서를 한없이 미루게 한다. 그리고 독서는 무엇보다 습관이다. 호기심에서 열정이 자라 나오고, 열정이 습관을 만들어내고, 습관에서 의지가 형성된다. 이것이 없으면 살았어도 산 것이 아니리라. 결국 “읽어야 산다.”

얼마 전 등단 50년을 맞은 조정래 작가를 보도하는 뉴스를 잠깐 봤다. 작가가 한 말 두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젊은이들이 노력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지만, 인생은 결국 노력”이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글을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다.

평범한 듯 보이는 첫 번째 말을 한동안 곱씹어 보았다.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쉽게 주어지는 법이 없고 노력해서 얻은 것만이 소중하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찾아서 심신의 노고를 투여한 것만이 진정한 경험과 앎이 된다는 것을 안다. 고통이자 노동인 책 읽기, 그렇기 때문에 늘 지기만 했고 왠지 이번에도 또 질 것만 같은 싸움에서 진짜로 이겼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 읽기가 바로 그런 경험에 속하지 않을까.

“죽어서 태어나라! /이것을 모른다면, /그대는 어두운 지상에서/ 한낱 흐릿한 손님일 뿐.”(괴테, 「복된 동경」, 『서동시집』, 1814년)

최성만 독어독문학과 교수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으로 199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점 연구 분야는 미학, 비평, 문예학이다. 저서로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역서로 ‘예술의 사회학’, ‘윤이상의 음악세계’, ‘한 우정의 역사’, ‘아방가르드의 이론’, ‘독일 비애극의 원천’, ‘미메시스’, ‘삶은 계속된다’, ‘미메시스와 타자성’이 있으며 벤야민, 아도르노, 미메시스, 해체론 관련 논문을 다수 썼다. 2007년부터 ‘발터 벤야민 선집’(도서출판 길, 전15권) 기획과 번역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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