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고 싶어?’

어떤 일을 하든 자주 받는 질문이다. 어디를 가던 ‘왜’가 필요했고, 그때마다 구색에 맞춰 임기응변으로 대답했다. 학보 생활을 하면서는 왜 기자가 되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꽤 많았다. 그들은 물어보면서 나에게 어떠한 답변을 바라는 듯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나도 스스로에게 ‘왜 이 직업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 저 하고 싶다’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 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무거운 질문을 받아칠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남들에게 내가 왜 기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할 괜찮은 이유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그럴듯한 답을 얻지 못했다. 아직도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솔직하게 그저 기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취업에 가까워진 나이가 된 지금엔 ‘그냥’이라고 답하면 이유가 없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에게 ‘왜 하고 싶냐’는 질문은 마치 ‘왜 사는가’라는 물음과 같았다. 답하기 까다롭고 오래 품을수록 마치 목적 없는 삶을 표류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이에 비례해 질문에도 무게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에 맞는 무거운 답을 해야 한다고 느껴 부담감이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내 삶에 던진 질문이 오히려 나를 잠식시켰다.

특별한 답이 없음에도 괜찮아 보이는 이유를 만들었던 건 남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거창한 이유를 바라는 듯했고 원대한 목표를 말하지 못하면 꿈을 평가절하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있어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억지로 이유를 만든다고 해서 그게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걸. 타인에게 솔직해지는 건 힘들었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저 하고 싶다’는게 이유라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상록탑을 쓰는 과정도 내게는 그럴듯함을 벗어던지는 과정 중 하나였다.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보 지면과 웹사이트에 실리는 글이라는 생각에 큰 압박을 느꼈다. 의미있는 주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맸다. ‘주제가 시의성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부장이라는 위치에서 쓰기 때문에 글이 유려하고 매끄러워야 한다’이런 수많은 고민들이 나를 짓눌렀고 결국 설 연휴가 지나도록 쓰는 글마다 두 문단을 넘지 못했다. 시간은 지나는데 노트북에 띄워 놓은 워드 화면은 그저 하얗고 커서는 깜빡이기만 했다.

며칠 뒤에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이 시국에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갔지만 글감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빈 화면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학보의 생명은 시간 엄수이기에 나는 뭐라도 써야 했다. 그래서 거창한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내려놨고 드디어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글 읽는 걸 좋아하면서도 쓰는 건 두렵고 겁이 날 때가 더 많았다. 기자는 독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멋진 글을 써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구실이 변변치 않은 내 글을 본 누군가가 ‘학보 기자라면서 글 솜씨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나’라고 평가를 하면 어쩌지 하면서 막연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이번에 상록탑을 쓰면서 그 공포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꼭 대단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만 같고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건 치기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땐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추고 그냥 한다. 어차피 억지로 의미나 이유를 찾는다 해도 그건 내 것이 아닐 테니까. 이제는 나에게 꼭 맞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삶도 나쁘지만은 않다. 이렇게라도 언젠가는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나는 인생에서 너무 많은 것에 의미 부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